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나무 장난감 만드는 70세 노장 이야기
디지털 장난감의 홍수 속, 나무로 상상력을 만드는 사람
요즘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을 손에 쥔다. 디지털 장난감, 학습 로봇, AI 인형이 아이의 친구가 되고, 부모들은 교육 효과와 기능성을 우선한다. 그런 시대에 ‘나무 장난감’이라고 하면, 오래되고 불편하다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경기도 양평의 작은 마을 공방에는 여전히 손으로 장난감을 만드는 70세 노장이 있다. 이름은 김호섭. 그는 35년 넘게 나무 장난감을 만들어 온 사람이다.
그의 공방은 소박하다. 나무 냄새가 가득한 실내에는 작은 기계 몇 대와 오래된 도구들, 그리고 완성된 나무 장난감이 정갈하게 진열돼 있다. 기차, 병정, 미끄럼틀, 퍼즐, 블록, 자동차 등 모두 나무로 만든 장난감이다. “요즘 장난감은 말도 하고, 음악도 나오고, 불도 들어오죠. 근데 나는 그게 재미없어요. 애들이 스스로 놀아야 진짜 장난감이죠.” 그는 기계처럼 기능이 정해진 장난감보다, 아이가 상상해서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훨씬 중요하다고 말한다.
김호섭 장인은 매일 아침 6시에 공방 문을 연다. 주문이 없어도 나무를 다듬고, 새 장난감 스케치를 한다. 모든 디자인은 머릿속에서 구상된다. AI 프로그램도, 설계 소프트웨어도 쓰지 않는다. 종이에 펜으로 그린 밑그림을 바탕으로 나무를 자르고, 깎고, 조립한다. “요즘은 도면을 컴퓨터로 그린다지만, 나는 손이 먼저 움직여야 감이 와요. 손이 움직이기 전까지는 진짜 장난감이 아니에요.” 그의 손은 느리지만, 정직하다.
손끝에서 시작되는 감성의 기술, 감각의 장난감
김호섭 장인의 장난감은 하나하나가 다르다. 같은 기차 장난감이라도 나뭇결, 색감, 움직임이 조금씩 다르다. 일부러 기계로 똑같이 만들지 않는다. “아이들이 만지는 건데, 너무 똑같으면 재미없죠. 차라리 나뭇결이 다르고, 모양이 조금 다르면 그게 더 특별한 거예요.” 그는 사람의 손이 만든 흔적이야말로 아이들에게 ‘진짜 감각’을 전달한다고 믿는다.
나무를 고르는 일부터 신중하다. 대부분은 국내산 소나무, 자작나무, 참나무 등을 사용하고, 인체에 무해한 천연 도료만 쓴다. 그가 가장 신경 쓰는 건 ‘질감’이다. “아이들이 처음 만져보는 건 감촉이에요. 미끄러우면 미끄러워서 좋고, 거칠면 거칠어서 좋은 거죠. 그걸 억지로 매끄럽게 만드는 건 감각을 빼앗는 거예요.” 그래서 그는 손 사포로 나무를 다듬고, 마감은 천연 오일로만 한다.
AI는 데이터로 아이의 취향과 반응을 분석하고, 그에 맞는 장난감을 설계한다. 하지만 김 장인은 그 방식에 반대한다. “아이한테 필요한 건 정답이 아니라 상상이죠. 내가 만든 기차는 길이도 없고, 소리도 안 나요. 근데 그걸로 아이들이 도시도 만들고, 이야기도 만들어요.” 그는 장난감의 기능보다 ‘열려 있는 가능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장난감은 완성형이 아니라, 아이가 완성하는 구조다.
이런 철학은 수많은 부모와 아이에게 감동을 주었다. 어떤 엄마는 그가 만든 나무 블록으로 아들이 언어 발달이 빨라졌다고 전했다. 또 다른 부모는 디지털 장난감보다 아이가 훨씬 더 오래 집중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 말이 가장 보람 있다고 했다. “내가 만든 건 그냥 나무 덩어리인데, 애들은 그걸 세계로 만들어요. 그게 장난감이에요.”
기능보다 감정, 시장보다 사람을 위한 장난감
김호섭 장인은 단 한 번도 공장에서 대량 생산을 하지 않았다. 브랜드 제안도 있었고, 홈쇼핑이나 온라인 입점 제안도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많이 팔면 내 손이 빠지고, 내 손이 빠지면 이건 그냥 물건이 돼요.” 그는 기계가 만들 수 없는 감정의 흔적을 장난감에 담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도 하루에 만들 수 있는 장난감은 많아야 세 개뿐이다.
그는 공방을 찾는 이들과 꼭 대화를 나눈다. 누구를 위한 장난감인지, 어떤 용도로 쓸 것인지, 아이의 나이와 성격은 어떤지 묻는다. 때로는 직접 아이의 손을 만져보기도 한다. “아이 손이 작으면 손잡이도 작아야 해요. 말 안 해도 손이 말해줘요.” 그런 맞춤 제작은 비효율적이지만, 그는 이 방식이 수공예의 본질이라 믿는다. “맞지 않는 옷은 아무리 예뻐도 못 입잖아요. 장난감도 그래요. 아이한테 맞아야 잘 놀아요.”
한 번은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아이를 위한 장난감을 만들었다. 반복 동작을 좋아하고, 부드러운 질감을 선호한다는 부모의 이야기를 듣고, 그는 조용히 움직이는 나무 도르래 장난감을 만들어 주었다. 그 아이는 몇 달 동안 그 장난감만 가지고 놀았고, 부모는 감동을 눈물로 표현했다. “그런 순간이 있어요. 돈으로도, 기술로도 못 사는 순간이요. 그럴 때마다 내가 이 일을 왜 하는지 다시 알게 돼요.”
느림의 철학이 살아 있는 수공 장난감의 미래
김호섭 장인의 장난감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과는 거리가 멀다. 유행을 따라가지 않고, 디자인을 바꾸지도 않는다. 오히려 똑같은 기차, 똑같은 병정을 수십 년째 만들고 있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장난감은 유행이 없어야 해요. 세월이 흘러도 재미있고, 다시 꺼내도 똑같이 놀 수 있어야 해요.” 그의 제품은 오래 쓰는 장난감이고, 그만큼 오래 기억되는 장난감이다.
AI 시대에는 교육적 효과, 정서적 자극, 뇌 발달 등의 지표로 장난감이 평가된다. 수많은 알고리즘이 추천해 주는 최적의 완구가 넘쳐나지만, 김 장인은 그런 수치에 흔들리지 않는다. “장난감은 놀아봐야 알아요. 아이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게 진짜 교육이죠. 내가 만든 장난감은 설명서도 없고, 정답도 없어요. 그게 좋아요.” 그는 장난감이 아니라 아이의 세계를 만드는 사람이다.
현재 그는 마을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 교실도 운영 중이다. 별도의 수강료는 없다. 나무를 깎고, 붙이고, 칠하며,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요즘은 다 빨라요. 아이들도 그 속도에 지쳐요. 근데 나무를 만지면 마음이 느려져요. 그게 중요한 거예요.” 그는 그 속도에서 아이들이 자기만의 시간을 배우길 바란다.
김호섭 장인의 하루는 조용하지만 단단하다. 전기톱 대신 손톱, 기계 대신 손가락, 설계도 대신 상상이 중심인 작업이다. AI가 설계하고 조립하는 세상에서도, 아이를 위한 진짜 장난감은 여전히 ‘사람의 손’에서 나온다. 그래서 그의 장난감은 세월이 흘러도 버려지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아이의 기억에 남는 ‘감정이 있는 도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