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인두화로 그리는 전통 민화 장인 인터뷰

mystory54590 2025. 7. 8. 20:38

나무에 불로 새긴 그림, 시간보다 느린 예술

서울 종로구 낙원동의 골목 안쪽, 나무 타는 냄새가 퍼지는 한 작업실. 낡은 목제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은은한 향과 함께 눈에 띄는 것은 벽면을 가득 채운 나무 민화 작품들이다. 그리고 그 앞에서 인두를 쥐고 작업에 몰두한 이는 71세의 민화 장인 이성우 씨. 그는 나무판 위에 인두로 그림을 그리는 '인두화(印頭畵)' 기법으로 전통 민화를 재현하고, 다시 창조하는 작가이자 기술자다.

요즘 시대, 디지털 드로잉과 AI 일러스트레이터가 이미 화단의 중심을 차지한 지 오래다. 몇 초 만에 민화 스타일의 이미지도 출력되는 지금, 불을 이용해 하나하나 선을 태우는 작업은 너무도 오래되고 비효율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성우 장인은 말한다. “민화는 단순히 이미지를 옮기는 게 아니에요. 거기엔 이야기가 있고, 숨결이 있어요. 인두화는 그 이야기를 불로 되살리는 일입니다.”

인두화는 일반적인 그림과는 다르다. 붓 대신 600도 가까운 고열의 인두를 손에 쥐고, 나무 위에 천천히 눌러 그을리듯 선을 새겨야 한다. 실수 한 번이면 그림이 망가지기에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된다. 이성우 씨는 "선을 그리는 게 아니라 선을 눌러 만든다"는 표현을 쓴다. 그에게 인두화는 그리기보다는 새김이고, 흔적이며, 시간이다. 그는 매일 오전 6시에 공방을 열고, 3시간 이상은 말없이 불과 나무에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다.

AI 시대 인두화 민화 장인

전통 민화와 인두화의 만남, 장인의 철학

이성우 장인은 원래 한지에 붓으로 민화를 그리던 화가였다. 그러나 20여 년 전, 폐목으로 만든 도마에 우연히 인두로 그림을 새기던 경험이 그의 작업을 바꾸었다. “불로 그은 선이 마치 살아 있는 듯했어요. 붓보다도 더 원초적이고, 묵직했죠. 그날부터 본격적으로 인두화를 민화에 접목해 보기 시작했어요.” 이후 그는 학습용 교재나 전통 디자인을 넘어, 스토리텔링이 있는 인두화 민화를 만들어 왔다.

전통 민화는 풍속화, 길상화, 호작도, 화조도 등 상징이 강한 그림들이 많다. 인두화로 이를 표현하면 기존의 화려함은 줄어들지만, 선의 깊이와 감정의 여운은 오히려 강해진다. 이성우 씨는 “붓은 흐름이 있고 속도가 있지만, 인두는 정지된 감정이에요. 한 선, 한 점마다 집중이 필요하죠. 그래서 더 절제되고, 더 고요한 민화가 됩니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단순한 민화 재현이 아니라, 현대적인 여백과 해석이 공존하는 독특한 정서를 갖고 있다.

그는 작품마다 의뢰인이나 주제를 철저히 고려한다. 가정에 들일 복을 기원하는 ‘책가도’는 책장과 도구 하나하나를 상세히 새기고, 어린이 방에 둘 ‘호작도’는 무섭기보다 친근하게 만든다. 한 번은 부모가 아픈 아이를 위해 호랑이와 학이 등장하는 인두화 민화를 의뢰했고, 그는 3주간 매일 나뭇결을 읽고 선을 조율하며 한 점을 완성했다. “그 아이가 그 그림을 보고 미소 지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 기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감각과 불, 그리고 나무가 만드는 고유한 질감

인두화의 가장 큰 특징은 동일한 그림도 절대 똑같이 재현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뭇결은 모두 다르고, 불의 세기 역시 일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계는 균일함을 전제로 하지만, 인두화는 늘 미세하게 다른 결과를 낳는다. 이성우 장인은 그것을 ‘살아 있는 선’이라고 부른다. “매번 다른 결, 다른 습기, 다른 기분에서 선이 나와요. 그게 이 작업의 매력이죠. 기계로 복제할 수 없는 감정이 담기니까요.”

그는 인두 작업 전, 반드시 나무를 몇 시간 동안 닦는다. 그 이유는 단순한 먼지 제거가 아니라, 나뭇결을 ‘읽기 위함’이다. 어떤 나무는 휘어져 있고, 어떤 나무는 결이 억세다. “결이 얇은 나무는 인두가 잘 미끄러지고, 굵은 나무는 더 눌러야 하죠. 나무가 선을 안내해 줘요.” 이런 감각은 데이터로 입력할 수 없다. 손으로 쓸고, 눈으로 보고, 귀로 타는 소리를 듣는 행위들이 모두 작업의 일부다.

작업 중 가장 어려운 건 ‘균형’이다. 민화의 상징성과 조형미를 살리되, 나무와 불이라는 재료의 물성을 함께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너무 얇게 그으면 그림이 가볍고, 너무 태우면 나무가 상해요. 그 사이를 손끝으로 찾아야 해요. 온도계가 말해주는 게 아니고, 내 손이 알려주는 거예요.” 이성우 씨는 자신이 하는 일은 미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술자적인 감각이 없으면 불가능한 작업이라고 말한다.

AI 시대에 여전히 ‘손’이 남긴 선이 필요한 이유

AI는 이제 전통 민화도 학습하고, 모방하고, 새로운 창작도 할 수 있다. 수백 개의 민화 패턴을 분석해 신민화를 제안하고, 디지털 프린팅으로 원목에 그림도 입힌다. 그러나 이성우 장인은 그걸 ‘이미지’라고 말한다. “AI가 만든 건 그림이에요. 근데 내가 만든 건 흔적이에요. 불로 새긴 선은, 단순히 보이는 게 아니라 만져지는 감정이에요.” 그 차이는 디지털이 따라올 수 없는 손의 역사다.

그는 요즘 소수의 젊은 작가들과 인두화 워크숍을 진행한다. 전통 민화 기법을 배우기 위해 찾아온 20~30대 참가자 중 일부는 목공예나 자수 작업을 병행하며 전통과 현대를 잇는 시도를 하고 있다. “젊은 사람들이 이걸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면, 전통은 계속 살아있을 거예요. 전통은 고정된 게 아니라 이어지는 거니까요.” 그는 오히려 AI 시대가 손작업의 가치를 더 드러나게 할 거라고 본다.

작업이 끝나면 그는 늘 손으로 자기 작품을 만져본다. 그림이 아닌 ‘질감’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눈은 속일 수 있지만, 손은 절대 못 속여요. 손으로 만져봤을 때 살아 있으면, 그건 완성된 그림이에요.” 이성우 장인의 하루는 그렇게 시작되고 끝난다. 인두를 쥐고, 선을 눌러 그리고, 나무를 읽으며, 또 한 점의 민화를 완성한다.

AI가 그림을 그리는 세상에서도, 여전히 사람의 손이 남긴 선은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단순한 선이 아닌, 시간과 감정과 땀의 증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