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실과 바늘만으로 완성된 수제 인형 이야기

mystory54590 2025. 7. 9. 16:23

기계가 만들어낼 수 없는 손의 감정

서울 망원동의 주택가 골목, 오래된 단층집 한편에 작은 공방 하나가 있다. 창문 너머로 다양한 천 조각과 색실이 가지런히 놓인 이곳은 62세 수제 인형 장인 김경자 씨의 작업 공간이다. 그녀는 20년 넘게 오직 실과 바늘만으로 인형을 만들어왔다. 봉제 기계도, 디자인 소프트웨어도 없다. 대신 실을 꿰는 손과, 천을 자르는 감각, 그리고 하나하나 바느질해 완성하는 인내만이 이곳의 기술이다.

요즘 인형 제작은 철저히 자동화되어 있다. AI가 디자인을 완성하고, 기계가 정밀하게 재단과 봉제를 하며, 대량 생산된 인형은 전 세계로 배송된다. 하지만 김경자 씨는 아직도 종이에 손으로 디자인을 그리고, 헝겊 조각을 오려 손바느질로 인형을 완성한다. “기계는 똑같은 인형을 수천 개 만들 수 있지만, 저는 하나를 만들 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만들어요. 똑같은 사람 없듯이, 똑같은 인형도 없어요.”

그녀가 만든 인형들은 크기와 표정, 포즈 모두 조금씩 다르다. 눈의 간격이 살짝 다르거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거나, 귀가 살짝 짝짝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불완전함 속에 사람들은 감동한다. “그 차이가 생명을 불어넣는 거예요. 손으로 만들면, 인형이 아니라 누군가를 닮은 존재가 돼요.” 김경자 씨는 매번 인형을 만들 때마다, 그것을 선물 받을 사람의 마음을 상상하며 바늘을 든다. AI는 감정을 계산할 수 있어도, 감정을 실에 꿰지는 못한다.

AI 시대 수제 인형

천 조각과 추억이 만나 완성되는 인형

김경자 씨가 만드는 수제 인형의 특징 중 하나는 ‘의뢰자의 이야기’를 담는다는 점이다. 고객들은 종종 아이의 오래된 옷, 돌아가신 부모님의 스카프, 연인의 셔츠 등 ‘의미 있는 천’을 가져와 인형으로 만들어달라고 요청한다. 그녀는 그런 천들을 손에 쥐고, 한참 동안 감촉을 느낀 뒤 어떤 인형으로 만들지 생각한다. “이건 따뜻한 엄마 느낌이니 곰 인형이 어울리고, 이건 부드럽고 얇아서 아기 인형이 좋아요.” 천의 감촉을 기억하고, 거기에 감정을 덧입히는 것. 그것이 그녀의 기술이다.

어느 날, 유아기 때 사망한 아이의 옷으로 인형을 만들고 싶다는 부모의 의뢰가 있었다. 김경자 씨는 아이 옷의 단추, 포켓, 레이스 장식을 그대로 살려 작은 인형을 만들었고, 그 인형은 이후 가족의 거실 한편에 놓여 아이의 흔적처럼 자리 잡았다. “그 인형은 단순한 장난감이 아니라, 그 가족의 기억을 담은 존재가 됐어요. 그렇게 기억이 형태가 되는 걸 보면 저도 마음이 뭉클하죠.”

인형의 머리카락, 눈동자, 손 모양까지 모두 손바느질로 이루어진다. 실밥 하나에도 의도가 담긴다. 그녀는 실을 당길 때 세게 잡아당기면 인형의 표정이 날카로워지고, 살살 당기면 인상이 부드러워진다고 말한다. “인형의 기분이 실의 장력에 따라 달라져요. 바느질은 힘의 조절이에요. 감정도 조절하고, 기억도 꿰매는 일이죠.” 이처럼 그녀가 만드는 인형은 단순한 오브제가 아닌, 감정을 담은 조각품에 가깝다.

수제 인형의 가치는 시간과 정성에서 비롯된다

하나의 인형을 완성하는 데 평균 3일이 걸린다. 디자인 구상부터, 재단, 바느질, 눈코입 자수, 옷 만들기, 머리카락 심기까지 모든 과정이 손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빠르면 하루 만에 수백 개의 인형을 생산할 수 있는 대량 생산 체계에 비하면 턱없이 느린 속도다. 하지만 김경자 씨는 말한다. “느린 만큼 기억이 오래 남아요. 인형을 만드는 시간만큼 그 사람의 마음이 담기니까요.”

그녀는 대량 생산 제품과 차별화된 수제 인형의 가치를 ‘정성’에서 찾는다. 재료 하나도 쉽게 고르지 않는다. 인형에 사용할 천은 피부에 닿았을 때의 감촉, 아이가 입에 물었을 때의 안전성까지 고려해서 결정된다. “아이들이 인형을 물고 자는 걸 보니까, 이건 그냥 장난감이 아니라 아이의 친구예요. 그래서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안 돼요.” 김 씨는 천연염료로 물든 천, 알러지 테스트를 거친 솜 등 가장 안전한 재료만을 고집한다.

가격은 기성품보다 비싸지만, 그녀의 인형은 주문 대기만 2~3주 이상 걸릴 정도로 인기가 많다. 고객들은 인형이 가진 손맛, 그리고 담긴 이야기에 끌려 다시 그녀를 찾는다. “기계로는 못 느끼는 온기가 있어요. 그래서 제 인형은 자꾸 만지고 싶고, 곁에 두고 싶대요.” 그녀는 인형을 만들며 정성을 꿰매고, 인형을 받는 사람은 그 정성을 손끝으로 느낀다. 그것이 기계와 손의 차이이자, 인형의 본질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AI 시대에도 ‘손’이 필요한 이유

AI는 이제 봉제 패턴을 자동으로 설계하고, 원단 낭비를 최소화하며, 색상과 디자인까지 고객 취향에 맞춰 제안한다. 3D 프린팅 기술로 인형을 바로 출력하기도 하고, 소비자는 클릭 몇 번이면 자신만의 커스터마이징 인형을 주문할 수 있다. 하지만 김경자 씨는 그런 흐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손으로 만드는 인형의 가치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AI는 예쁜 인형을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따뜻한 인형은 사람이 만들어야 해요.”

그녀는 최근 젊은 엄마들과 함께하는 ‘수제 인형 만들기 수업’을 운영하고 있다. 손바느질이 처음인 이들도, 아이에게 직접 인형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공방을 찾는다. “모두 손이 서툴지만, 그게 오히려 아이에겐 더 특별한 인형이 돼요. 엄마가 만든 거니까요.” 그녀는 기술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걸, 수십 년 작업을 통해 체득했다.

김경자 씨의 꿈은 단순하다. “누군가의 손에, 오래오래 남는 인형 하나 남기는 것.” 그래서 그녀는 오늘도 천을 고르고, 실을 꿰고, 손으로 조심스레 인형을 완성한다. AI가 아무리 정교한 인형을 만들어도, 그 인형이 사람의 마음을 대신해 안아줄 수는 없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인형은, 단순한 장난감을 넘어선 ‘감정의 매개체’가 되기 때문이다.

기계는 정확하지만, 사람은 따뜻하다. 실과 바늘만으로 태어난 인형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는 그 안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진심은, 아무리 발전한 기술이라도 따라잡을 수 없는 ‘손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