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전통 등롱 복원 전문가의 기록

mystory54590 2025. 7. 11. 13:53

잊힌 빛을 되살리는 사람

경기도 남양주의 조용한 산자락 아래, 오래된 한옥을 개조한 작업실에서 작은 불빛이 밤늦도록 깜빡인다. 전기조명이 아닌 전통 등롱의 희미한 불빛이다. 이 등롱을 복원하고 재현하는 장인은 올해 68세가 된 박정근 씨다. 그는 40년 넘게 전통 조명, 그중에서도 궁중에서 쓰이던 등롱을 복원해 온 국내 유일의 수공예 전문가다.

AI가 3D 스캔 기술을 기반으로 유물을 디지털 복원하는 시대에, 박정근 씨는 여전히 한지, 소나무, 밀 풀, 금박, 옻칠을 손으로 다루며 등롱 하나를 복원한다. “디지털은 형태만 따라가요. 나는 온도를 기억해요. 등불은 그 시대의 공기와 감정을 복원하는 일이에요.” 그는 등롱이 단순한 조명이 아닌 ‘시대를 비추던 상징’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복원 대상은 조선시대 궁중이나 양반가에서 사용하던 의례용 등롱이 주를 이룬다. 기둥의 각도, 창살의 간격, 불빛이 통과하는 종이의 색까지도 당시 기록을 참조하며 하나하나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 “불빛의 농도까지 고려해야 해요. 단순히 모양이 비슷하다고 복원이 아니에요. 그 시대의 감정을 따라가야 해요.” 그는 문화재로서의 조명, 그리고 조명으로서의 문화재 사이를 오가며 손으로 시간을 되살린다.

AI 시대 전통 등롱 복원 전문가

복원은 제작이 아닌 ‘기억의 수선’

박정근 씨가 전통 등롱을 처음 접한 것은 국립박물관에서 문화재 수리 기능인으로 일하던 시절이었다. 복원 도중, 당시 자료가 부족해 제대로 된 등롱 형태를 찾기 어려웠고, 그는 직접 고서와 의궤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림 속 등롱을 확대하고 또 확대했어요. 조각 하나하나를 손으로 그려보고, 도면 없이 만드는 연습을 수백 번 했죠.” 그렇게 시작된 작업은 곧 그의 평생 업이 됐다.

등롱 복원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다. 먼저 남아 있는 파편들을 분석한 뒤, 어떤 나무를 썼는지, 종이는 어떤 방식으로 붙였는지, 색은 천연 안료였는지를 손끝으로 확인해야 한다. “옻칠이 벗겨진 자리엔 그 시대의 습기와 온도가 남아 있어요. 그걸 느껴야 똑같이 칠할 수 있어요.” 그는 붓질 하나, 종이 한 장을 붙이는 데에도 그 시대 사람들의 감정을 상상한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빛의 질감’을 되살리는 것이다. LED 조명과 달리, 전통 등롱은 기름 등 혹은 초의 불빛을 활용했다. 그는 실제로 기름 등을 켜 보고, 그 불빛이 종이를 통과해 만드는 음영과 그림자를 기록한 뒤, 그에 맞는 종이의 결과 밀 풀 농도를 조절한다. “등롱은 어둠 속에서만 완성돼요. 복원도 조명을 켜야만 끝나요. 그때, 그 불빛이 조용히 떨리면 성공한 거예요.”

손으로 쌓는 시간, 기계가 흉내 내지 못하는 공정

등롱 복원의 과정은 느리고, 까다롭고, 반복적이다. 박정근 씨는 소나무나 느티나무 같은 국내산 원목을 직접 구해 와서 잘 말린 뒤, 전통 기법으로 대패질과 홈파기를 한다. 각 기둥과 창살은 전통 방식대로 홈을 맞춰 끼워 넣고, 못을 사용하지 않는다. 나무골격이 완성되면 한지를 손으로 붙이기 시작하는데, 이때 한지를 한 장 한 장 수작업으로 물에 적셔 말려가며 밀 풀로 고정한다.

“기계는 직선과 곡선을 일정하게 만들지만, 사람 손은 상황마다 다르게 반응해요. 종이가 오늘 더 축축하면 풀도 바꿔야 하고, 날씨가 건조하면 칠의 순서도 달라져요.” 이 복원 방식은 일정한 공식이 없다. 그날의 공기, 손의 컨디션, 재료의 미세한 차이까지 반영해야 하는 고도의 감각적 작업이다.

칠을 할 땐 옻칠과 천연 안료를 혼합해 쓰는데, 색을 낼 때도 단순히 기존 등롱 색을 복제하지 않는다. 당시 조도와 재료의 산화를 고려해 색을 다시 조정한다. “100년 전의 색을 지금 그대로 낼 수 없어요. 대신 지금 보는 시점에서 그 색이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를 판단해서 결정해요.” 이처럼 복원은 재현이 아니라, 기억을 현재로 이끄는 감정의 기술이 된다.

그가 하루에 복원할 수 있는 등롱은 많아야 하나다. 때로는 2주 이상 걸리는 작업도 있다. 고객은 대부분 박물관, 전통 공간, 고택 복원 프로젝트팀이며, 일부는 명상센터나 전통 다실에서도 요청이 들어온다. “한 번은 등롱을 설치한 다실 주인이 밤마다 눈물이 난다고 했어요. 어린 시절 외할머니 집 마루에 있던 그 등불 같다고요.” 복원은 과거를 현재에 되살리는 예술이기도 하다.

AI 시대에도 복원이 ‘사람의 일’인 이유

AI 기술은 문화재 복원에도 속속 도입되고 있다. 손상된 유물을 3D 스캔으로 분석하고, 손실된 부분을 알고리즘으로 예측해 복원하는 방식이 점점 보편화되고 있다. 하지만 박정근 씨는 그런 기술을 ‘형태의 복원’이라 부른다. “눈에 보이는 건 쉽게 따라 하죠.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못 따라 해요. 등롱은 손으로 만든 정서의 그릇이에요.”

그는 복원 대상이 단순히 물건이 아니라, 과거 사람들의 손길과 마음이 담긴 상징물이라고 본다. “등롱 하나에도 누군가의 정성과 의도가 있어요. 어떤 이는 왕의 초상을 비추기 위해 만들었고, 어떤 이는 아들을 기다리며 밤을 지새웠겠죠.” 그래서 그는 AI 기술을 참고는 하되, 반드시 손으로 끝맺는다. 감정을 복원할 수 있는 건 결국 사람뿐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을 배우겠다는 젊은 세대도 있지만, 대부분 중도에 포기한다. 공정이 길고,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말한다. “기술은 사라져도, 기록은 남겨야 해요. 그래서 오늘도 한지 붙이는 순서, 칠하는 붓 방향, 불빛의 흔들림까지 모두 기록해요.” 그는 지금도 손으로, 종이로, 나무로 시간을 되살리고 있다.

AI가 유물의 모양은 되살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의 손이 남긴 결과 흔적까지 복원할 수는 없다. 등롱은 단순한 빛이 아니라, 과거의 마음이 켜지던 불빛이다. 박정근 씨가 복원하는 건 단순한 조명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이 깃든 시간이다. 그래서 그 기술은 여전히, 반드시 사람의 손으로 완성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