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가 모방할 수 없는 손의 곡선
인공지능이 설계부터 조립까지 수행하는 조명 디자인 시대. 3D 프린터로 만들어진 조명기구는 그 형태도 독창적이고, 생산 속도도 빠르며, 효율성까지 갖췄다. 그러나 강원도 원주의 한 조용한 공방에선 여전히 철사를 손으로 구부리고, 땀으로 엮어가며 조명을 만드는 장인이 있다. 올해 58세의 조명 장인 최상훈 씨는 지난 25년간 철사 한 가닥 한 가닥을 엮어 자신만의 빛을 만들어 왔다.
최 장인의 조명은 멀리서 보면 가느다란 곡선이 얽히고설켜 마치 생명체처럼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그는 철사라는 단단한 재료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유연하게 다루고, 빛이 통과하는 방향까지 계산해 배치한다. “철사는 고집이 세요. 한 번 굽으면 기억이 남죠. 그래서 손으로 말을 걸듯이 천천히 구부려야 해요.” 기계는 이 복잡하고 불완전한 곡선을 정형화할 수 없기에, 그의 작업은 언제나 ‘손’이 중심이 된다.
그가 쓰는 철사는 구리, 황동, 스테인리스, 때로는 철을 녹슬게 해 텍스처를 만들기도 한다. 재료를 다듬는 과정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감각의 작업이다. 굵기, 강도, 색상, 탄성을 손끝으로 느끼고, 그에 따라 감아내는 강도와 방향도 달라진다. AI가 도면을 분석할 수는 있지만, 그 재료가 가진 물성을 ‘감각’하는 일은 오직 사람의 손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최 장인의 조명은 그래서 기계로 절대 복제할 수 없는 유일한 형태를 가진다.
철사와 빛의 조화, 조명 그 이상을 만드는 손
조명을 단순히 ‘빛을 내는 물건’으로 생각한다면, 그의 작품은 설명되지 않는다. 최상훈 장인은 철사를 엮는 동시에 그 안에 감정과 시간을 채운다. “조명은 공간을 밝히기도 하지만, 사람의 기분도 함께 밝혀야 해요. 밝기보단 분위기가 중요하죠.” 그래서 그는 전구의 위치, 색온도, 빛의 방향까지 철사의 구조에 따라 정교하게 설계한다.
작업의 시작은 스케치가 아니라 철사 한 줄을 손에 쥐는 것이다. 재료와 대화를 나누듯이 첫 곡선을 만든 뒤, 이어지는 선은 손이 기억하는 흐름을 따른다. “머리로 계산하면 선이 딱딱해지고, 손으로 느끼면 선이 살아나요.” 완성된 조명 하나에는 수천 번의 손놀림이 담겨 있고, 하나하나의 결은 모두 다른 표정을 갖는다.
한 번은 한 고객이 집에 있는 오래된 피아노 위에 맞는 조명을 의뢰했다. 최 장인은 피아노의 나뭇결, 방 안의 채광, 사용자의 눈높이 등을 고려해 조명을 만들었다. 그 조명은 빛을 벽에 반사해 은은하게 퍼지도록 구성되었고, 그 고객은 “음악이 더 잘 들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좋은 조명은 단순히 밝은 게 아니라, 감정을 방해하지 않는 빛”이라고 설명한다.
그가 제작한 조명은 전시회, 갤러리, 음악회장, 요가 스튜디오 등 다양한 공간에 들어가지만, 하나같이 ‘손으로 만든 온기’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계로 깎은 조명은 완벽하지만 차갑고, 그의 조명은 불완전하지만 따뜻하다. 그 온기는 철사와 빛, 그리고 사람의 손끝이 만나서야 만들어질 수 있다.
사람의 삶을 따라가는 조명 디자인
최상훈 장인의 조명은 사람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단순히 형태만을 위한 디자인이 아니라, 사용자와 공간, 기억을 고려한 결과물이다. 그는 “조명은 빛보다 사람을 위한 도구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의뢰인이 어떤 공간에 어떤 마음으로 조명을 두고 싶은지부터 묻는다. “살아온 이야기, 요즘 고민, 창문 방향까지 들어야 진짜 디자인이 나와요.”
한 번은 암 투병 중인 중년 여성이 방에 둘 조명을 요청했다. 최 장인은 그 의뢰인의 말을 들으며 ‘위로하는 조명’을 상상했다. 그는 철사를 나뭇가지처럼 엮어 은은하게 퍼지는 조명을 만들었고, 고객은 완성된 조명을 보며 울었다고 한다. “빛이 나를 안아주는 느낌이었다는 말에 저도 울었어요.” 이런 순간은 기계가 따라 할 수 없는, 사람 대 사람의 공감에서 만들어진다.
조명등을 설치한 후에도 그는 종종 고객과 연락을 유지한다. 빛의 세기는 괜찮은지, 색감은 편안한지, 공간에 어울리는지 피드백을 받아 수정하기도 한다. 이는 일반 제품에서는 보기 어려운 접근이다. 그의 조명은 ‘물건’이 아니라 ‘과정’이고, 사람과 함께 진화하는 작품이다. 그래서 그의 고객 중 상당수는 재의뢰를 하고, 지인을 소개한다.
조명을 파는 것이 아니라, 조명과 함께할 시간을 설계하는 것. 이것이 최 장인의 작업 철학이다. 그는 조명을 ‘정적인 빛’이 아닌 ‘감정과 함께 흘러가는 생명체’처럼 여긴다. 철사를 엮는 일은 단순히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을 감싸는 빛을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그의 손은 느리지만 단단하게 움직인다.
AI 시대에도 살아 있는 조명, 그 손이 만든 빛
AI 기반 디자인 툴은 이미 사람보다 빠르고 정교하게 조명을 설계한다. 조명 산업의 자동화도 나날이 발전해, 클릭 한 번으로 커스터마이징 할 수 있는 제품이 넘쳐난다. 그러나 최상훈 씨는 말한다. “AI는 효율적이지만, 감정을 이해하진 못해요. 빛이 닿는 순간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건 오직 손으로 만든 조명이에요.”
그는 요즘 젊은 디자이너들과 협업을 시도하고 있다. 3D 프린팅과 수공 철사 구조를 결합한 하이브리드 작업을 통해 새로운 방식의 조명 디자인을 실험하는 중이다. 그러나 중심은 여전히 ‘손’이다. “기계가 기본 구조를 만들 수는 있어요. 하지만 마지막 선은 반드시 손으로 꺾어요. 그래야 사람을 위한 조명이 돼요.” 그가 강조하는 건 기술과 사람 사이의 균형이다.
작업이 끝나면 그는 조명을 끄고, 밤이 내린 작업실에서 조용히 손을 씻는다. 하루 종일 철사에 눌렸던 손가락의 감각이 아직도 살아 있는 상태에서, 그는 다음 날을 위한 구상을 한다. “철사는 기억을 품고 있어요. 내가 오늘 어떤 마음으로 구부렸는지를 말없이 전하죠. 그래서 조명 하나에도 내 하루가 들어가요.”
AI가 공간을 분석하고, 빛을 자동으로 조절하는 시대다. 하지만 누군가의 손이 엮은 철사와 그 사이로 스며든 빛은, 아직도 사람의 감정을 가장 조용히 감싸는 도구로 남아 있다. 최상훈 장인의 손에서 태어난 조명은 그래서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사람의 삶을 따라 흐르는 ‘살아 있는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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