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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종이접기로 삶을 지탱하는 작가의 하루

종이 한 장에 담긴 세계, 손끝에서 피어나는 형상서울 은평구의 한 조용한 골목, 오래된 주택을 개조한 작은 작업실 안. 정갈하게 쌓인 종이 뭉치 사이에서 손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가위도 풀도 없다. 오직 손가락의 감각만으로 종이를 꺾고 접는 행위가 계속된다. 올해 마흔넷, 종이접기 작가 정민서 씨는 지난 15년 동안 종이 하나로 생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는 오늘도 종이 위에 생명을 불어넣는다.종이접기는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해봤던 놀이지만, 정민서 씨에게는 삶의 방식이자 예술이다. “종이는 가장 단순한 재료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재료예요. 칼이나 도구 없이도, 접기만으로 구조가 생기고, 감정이 생기죠.” 그는 평면의 종이가 입체로 변하는 찰나의 감각을 사랑한다. 그 감각은 설계가 아니라 손..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바느질 책갈피 작가

천 조각 위를 걷는 이야기, 바느질로 완성된 한 줄의 감성경기도 파주의 한 골목, 출판 단지와 인쇄소 사이에 위치한 조용한 작업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실과 바늘이 천을 통과하는 ‘슥슥’ 소리가 정적을 채운다. 올해로 12년째, 이곳에서 오직 바느질로 책갈피를 만드는 작가 이나경 씨(41)는 하루도 빠짐없이 책 속에 담을 감정을 천 조각에 꿰매고 있다. 그녀는 자신을 ‘침묵하는 이야기꾼’이라 부른다. 말 대신 바느질로, 문장 대신 자수로 누군가의 기억을 남기는 사람이다.이나경 작가의 책갈피는 단순한 문구용품이 아니다. 한 땀 한 땀 손으로 만든 그 조각들은 독자의 취향과 기억, 책의 내용과 분위기를 반영한 ‘작은 감정의 조각’이다. “책을 읽는 시간은 대부분 조용하잖아요. 저는 그 조용한 순간에 함께 ..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전통 등롱 복원 전문가의 기록

잊힌 빛을 되살리는 사람경기도 남양주의 조용한 산자락 아래, 오래된 한옥을 개조한 작업실에서 작은 불빛이 밤늦도록 깜빡인다. 전기조명이 아닌 전통 등롱의 희미한 불빛이다. 이 등롱을 복원하고 재현하는 장인은 올해 68세가 된 박정근 씨다. 그는 40년 넘게 전통 조명, 그중에서도 궁중에서 쓰이던 등롱을 복원해 온 국내 유일의 수공예 전문가다.AI가 3D 스캔 기술을 기반으로 유물을 디지털 복원하는 시대에, 박정근 씨는 여전히 한지, 소나무, 밀 풀, 금박, 옻칠을 손으로 다루며 등롱 하나를 복원한다. “디지털은 형태만 따라가요. 나는 온도를 기억해요. 등불은 그 시대의 공기와 감정을 복원하는 일이에요.” 그는 등롱이 단순한 조명이 아닌 ‘시대를 비추던 상징’이라는 점을 강조한다.복원 대상은 조선시대 궁중..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한지 등불 만드는 장인의 손과 마음

전기를 이긴 빛, 한지 등불이 비추는 시간현대인의 일상은 밝다. 스마트폰 화면, LED 조명, 자동 감지 등까지. 밤에도 어둡지 않은 도시에서 사람들은 언제든 버튼 하나로 빛을 만든다. 그러나 충청북도 괴산의 조용한 마을, 작은 작업실 안에는 전기보다 느리고, 디지털보다 따뜻한 빛이 존재한다. 바로 장인 김형구 씨(65)의 손에서 태어나는 한지 등불이다. 그는 지난 30년간 오직 손으로 등불을 만들어온 사람이다.김형구 씨가 만드는 등불은 전통 한지를 바탕으로 나무 골격을 짜고, 그 위에 풀칠로 천천히 종이를 입혀가며 완성된다. 전기 조명을 위한 기능성보다는, 빛이 퍼져 나가는 감도와 결, 그림자의 모양을 고려해 만든다. “한지 등불은 밝은 게 목적이 아니에요. 조용히 공간을 감싸는 거죠. 어둠을 없애기보..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골목 이발사의 마지막 손기술

골목 깊숙한 곳, 아직도 살아 있는 이발의 감각서울 동작구 흑석동의 오래된 골목. 깨끗이 닦인 유리창 너머로 돌아가는 파란색과 빨간색의 회전등이 여전히 빛난다. 간판에는 큼직한 붓글씨로 ‘○○이용원’이 쓰여 있고, 문을 열면 고즈넉한 라디오 소리와 함께 이발용 의자 하나가 반긴다. 올해로 75세가 된 이발사 조용남 씨는 1969년부터 지금까지 이 자리를 지켜온 골목의 산증인이다. 그는 여전히 전동 커트기 대신 가위와 손끝 감각만으로 머리를 다듬는다.AI가 얼굴형을 분석해 최적의 스타일을 추천하고, 자동 커트 기계가 오차 없는 대칭을 만들어내는 시대다. 그러나 조용남 씨는 말한다. “사람 머리는 숫자가 아니에요. 두상이 다르고, 머릿결이 다르고, 그날의 기분도 달라요. 그런 건 손으로 느끼는 거예요.” 그..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실과 바늘만으로 완성된 수제 인형 이야기

기계가 만들어낼 수 없는 손의 감정서울 망원동의 주택가 골목, 오래된 단층집 한편에 작은 공방 하나가 있다. 창문 너머로 다양한 천 조각과 색실이 가지런히 놓인 이곳은 62세 수제 인형 장인 김경자 씨의 작업 공간이다. 그녀는 20년 넘게 오직 실과 바늘만으로 인형을 만들어왔다. 봉제 기계도, 디자인 소프트웨어도 없다. 대신 실을 꿰는 손과, 천을 자르는 감각, 그리고 하나하나 바느질해 완성하는 인내만이 이곳의 기술이다.요즘 인형 제작은 철저히 자동화되어 있다. AI가 디자인을 완성하고, 기계가 정밀하게 재단과 봉제를 하며, 대량 생산된 인형은 전 세계로 배송된다. 하지만 김경자 씨는 아직도 종이에 손으로 디자인을 그리고, 헝겊 조각을 오려 손바느질로 인형을 완성한다. “기계는 똑같은 인형을 수천 개 만..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철사를 엮어 만든 조명 장인의 기술

기계가 모방할 수 없는 손의 곡선인공지능이 설계부터 조립까지 수행하는 조명 디자인 시대. 3D 프린터로 만들어진 조명기구는 그 형태도 독창적이고, 생산 속도도 빠르며, 효율성까지 갖췄다. 그러나 강원도 원주의 한 조용한 공방에선 여전히 철사를 손으로 구부리고, 땀으로 엮어가며 조명을 만드는 장인이 있다. 올해 58세의 조명 장인 최상훈 씨는 지난 25년간 철사 한 가닥 한 가닥을 엮어 자신만의 빛을 만들어 왔다.최 장인의 조명은 멀리서 보면 가느다란 곡선이 얽히고설켜 마치 생명체처럼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그는 철사라는 단단한 재료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유연하게 다루고, 빛이 통과하는 방향까지 계산해 배치한다. “철사는 고집이 세요. 한 번 굽으면 기억이 남죠. 그래서 손으로 말을 걸듯이 천천히 구부려..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붓 하나로 생계를 이어온 캘리그라피 장인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의 선디지털 글씨가 넘쳐나는 시대, 사람 손으로 그려진 한 글자의 가치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자동화된 디자인 툴과 수천 가지 폰트, 그리고 AI 기반의 캘리그라피 생성기는 단 몇 초 만에 감각적인 손글씨 스타일을 완성해낸다. 이런 세상 속에서, 서울 도봉구의 한 오래된 공방에선 여전히 붓을 들고 하루를 시작하는 이가 있다. 올해 예순넷, ‘붓 장인’으로 불리는 캘리그라피 작가 정영수 씨는 지난 35년 동안 단 하나의 도구로 삶을 버텨왔다.정영수 씨는 오전 7시 반이면 먹을 갈고, 붓의 털을 정돈하며 하루를 준비한다. 작업실 안은 적막하다. 라디오도 틀지 않고, 조용한 정적 속에서 손끝의 감각만으로 먹빛을 조율한다. “글씨는 소리 없는 감정이에요. 말로는 못 하는 마음이 선으로 나..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인두화로 그리는 전통 민화 장인 인터뷰

나무에 불로 새긴 그림, 시간보다 느린 예술서울 종로구 낙원동의 골목 안쪽, 나무 타는 냄새가 퍼지는 한 작업실. 낡은 목제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은은한 향과 함께 눈에 띄는 것은 벽면을 가득 채운 나무 민화 작품들이다. 그리고 그 앞에서 인두를 쥐고 작업에 몰두한 이는 71세의 민화 장인 이성우 씨. 그는 나무판 위에 인두로 그림을 그리는 '인두화(印頭畵)' 기법으로 전통 민화를 재현하고, 다시 창조하는 작가이자 기술자다.요즘 시대, 디지털 드로잉과 AI 일러스트레이터가 이미 화단의 중심을 차지한 지 오래다. 몇 초 만에 민화 스타일의 이미지도 출력되는 지금, 불을 이용해 하나하나 선을 태우는 작업은 너무도 오래되고 비효율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성우 장인은 말한다. “민화는 단순히 이미지를 옮기..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오르골을 직접 조립하는 기술자의 일상

기계음보다 정교한 손끝에서 태어나는 소리서울 마포구의 오래된 건물 2층. 간판도 없는 그 공간에서 맑은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한 음, 한 음이 마치 사람 손끝에서 튕겨 나온 듯, 온기와 울림을 머금고 있다. 이곳은 41세 기술자 윤지환 씨가 운영하는 수제 오르골 공방이다. 그는 지금도 모든 오르골을 손으로 조립하고, 음 하나하나의 울림을 귀로 조율하며 하루를 보낸다.오르골은 더 이상 대중적인 물건은 아니다. 디지털 음악이 손쉽게 소비되고, AI 작곡 기술이 등장한 오늘날, 오르골의 존재는 낡은 감성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윤지환 씨는 말한다. “오르골은 단순한 음악 장치가 아니에요. 기계 안의 시간, 감정, 기억이 들어 있어요. 손으로 만드는 건 그 감정을 조율하는 일이죠.” 그는 직접 금속 실린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