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붓 하나로 생계를 이어온 캘리그라피 장인

mystory54590 2025. 7. 9. 09:09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의 선

디지털 글씨가 넘쳐나는 시대, 사람 손으로 그려진 한 글자의 가치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자동화된 디자인 툴과 수천 가지 폰트, 그리고 AI 기반의 캘리그라피 생성기는 단 몇 초 만에 감각적인 손글씨 스타일을 완성해낸다. 이런 세상 속에서, 서울 도봉구의 한 오래된 공방에선 여전히 붓을 들고 하루를 시작하는 이가 있다. 올해 예순넷, ‘붓 장인’으로 불리는 캘리그라피 작가 정영수 씨는 지난 35년 동안 단 하나의 도구로 삶을 버텨왔다.

정영수 씨는 오전 7시 반이면 먹을 갈고, 붓의 털을 정돈하며 하루를 준비한다. 작업실 안은 적막하다. 라디오도 틀지 않고, 조용한 정적 속에서 손끝의 감각만으로 먹빛을 조율한다. “글씨는 소리 없는 감정이에요. 말로는 못 하는 마음이 선으로 나와야 해요.” 그는 작업을 시작할 때 종이를 마주 보고 앉은 뒤, 그날의 기분을 먼저 느낀다고 한다. “손이 가볍다면 부드럽고 유연한 선이 나오고, 마음이 무거우면 획이 눌려요. 그게 진짜 사람이 쓰는 글씨예요.”

그가 고집하는 건 완벽한 균형이나 기술적인 세련미가 아니다. 오히려 붓끝이 마르고, 선이 울퉁불퉁하며, 먹이 고르지 않게 퍼지는 ‘살아 있는 흔적’을 글씨의 본질로 본다. “기계는 오류를 없애려고 해요. 하지만 나는 오류 속에서 감정을 발견해요.” 그래서 그의 글씨는 똑같은 문장을 쓰더라도 매번 달라진다. 같은 말, 같은 붓, 같은 종이지만 그날의 감정, 손의 떨림, 숨의 길이에 따라 전혀 다른 글씨가 태어난다. 이것이 바로 정영수 장인의 손 글씨가 단순한 타이포그래피가 아닌 ‘삶의 흔적’으로 읽히는 이유다.

AI 시대 캘리그라피 장인

간판장이에서 붓 장인으로, 잊히지 않는 손의 기억

정영수 씨는 처음부터 예술가로 불리던 사람은 아니었다. 20대 초반, 그는 간판장이로 일을 시작했다. 당시엔 손 글씨 간판이 흔했고, 붓과 물감을 들고 거리를 누비며 글씨를 써주는 직업이 존재했다. “한자 쓰는 걸 좋아해서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먹고살게 됐어요.” 그는 포목점, 약국, 여관 간판까지 직접 손 글씨로 써 내려갔다. 지금은 모두 사라졌지만, 그 글씨들이 남아 있는 간판은 아직도 몇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90년대 중반, 컴퓨터 그래픽이 등장하며 손 글씨 간판은 자취를 감췄다. 많은 사람이 붓을 놓았고, 정영수 씨 역시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 붓을 내려놓지 않았다. “손 글씨로는 더 이상 간판을 쓸 수 없었지만, 사람의 마음을 담는 글씨는 여전히 필요했어요.” 그가 택한 건 기념 족자, 현판, 전시회 타이틀, 행사 타이틀, 결혼 청첩장, 부고문 등 사람의 인생과 함께하는 글씨였다.

한 번은 자녀의 결혼을 앞두고 부모님이 의뢰한 청첩장 문구를 직접 써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3일 동안 먹을 갈며, 각자의 성격에 맞는 획의 방향을 고민하고 수십 번을 다시 썼다. “딸의 이름은 부드럽고 유연하게, 사위의 이름은 곧고 선하게 썼어요. 그런 디테일은 기계가 줄 수 없어요.” 또 한 번은 암 투병 중인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편지를 쓰고 싶다며 방문한 남성의 글씨를 대신 써준 적이 있다. “그 편지에 있는 진심은 제 손에도 전해졌고, 그 순간 제 글씨가 제 역할을 했다는 걸 느꼈죠.”

글씨에 감정을 담아내는 일, 그래서 쉬운 날이 없는 일

정영수 씨는 요즘도 하루에 최소 세 시간 이상 붓을 잡는다. 의뢰가 없어도 손이 굳는 게 싫어서다. “글씨는 손으로 쓰지만, 마음으로 완성돼요. 하루라도 붓을 놓으면 손이 굳고, 마음이 무뎌져요.” 그는 먹물의 농도, 붓의 탄력, 종이의 질감까지 모두 손으로 직접 확인하며 작업을 이어간다. 이 모든 것은 수치화할 수 없고, 자료화되지 않는 영역이다. 오직 손과 감각으로 기억된 숙련의 결과다.

최근 들어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도 정영수 씨의 글씨를 찾는다. 자필 이름 현판, 작명 족자, 스승께 드릴 감사 글귀, 기념 타이틀 등 손 글씨의 감성에 매료된 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인스타그램에서 보고 연락했다는 젊은 분들이 많아졌어요. 손 글씨가 주는 감성이 좋대요. 그것만으로도 내가 이걸 계속할 이유가 되죠.” 그는 오히려 디지털 시대가 손 글씨의 ‘다름’을 더 부각하는 역할을 해주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글씨를 단순히 ‘예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정영수 씨가 생각하는 글씨란, ‘그 사람의 마음과 살아온 시간을 한 줄의 선에 담아내는 일’이다. “말로는 못 하는 마음, 눈빛으로도 전달되지 않는 감정이 글씨에 담겨요. 붓을 눌러서 써야 그 감정이 나와요. 그래서 매번 쓰는 게 어려워요.” 쉬운 글귀 하나에도 그는 수십 번 써보고, 마음에 맞는 형태가 나올 때까지 반복한다. 그리하여 완성된 한 줄의 글씨는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하나의 위로가 된다.

AI도 닿지 못할 ‘붓의 온기’를 남기는 사람

요즘은 AI 기반 캘리그라피 툴이 인기다. 입력한 문구에 따라 수백 가지 손 글씨 스타일이 자동 생성되고, 디자인툴과 바로 연동해 사용할 수 있다. 많은 디자이너는 이 기능을 활용해 작업 시간을 줄이고 있다. 그러나 정영수 씨는 그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AI는 사람의 손을 흉내 낼 수 있지만, 사람의 손이 느낀 감정은 흉내 낼 수 없어요. 글씨는 정보가 아니라 온기예요.”

그는 최근 제자들에게 캘리그라피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컴퓨터로 시작한 디자이너들도 붓을 잡고, 처음 먹을 갈아보며 말없이 집중하는 시간을 가진다. “처음엔 다들 긴장해요. 그런데 한 획 쓰고 나면 얼굴이 달라져요. 자기 글씨에 깜짝 놀라죠. 그때 가장 보람을 느껴요.” 그는 손으로 쓰는 일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창작이라고 강조한다.

정영수 씨의 꿈은 단순하다. 매일 붓을 들고, 글씨를 쓰고, 누군가의 마음에 닿는 글자를 남기는 것. 그리고 이 기술이 누군가에게 이어지길 바란다. “글씨가 사람을 닮듯이, 사람도 글씨에 닮아가요. 이게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는 오늘도 작은 작업실에서 붓을 들고, 한 획 한 획 마음을 담아 글자를 써 내려간다.

AI가 빠르고 정확하게 글자를 그려주는 시대에도, 사람의 마음을 닮은 한 줄의 선은 여전히 손끝에서 시작된다. 붓 하나로 삶을 이어온 장인의 손에서 태어난 그 선은, 감정과 시간이 녹아든 ‘살아 있는 문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