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골목 이발사의 마지막 손기술

mystory54590 2025. 7. 10. 16:18

골목 깊숙한 곳, 아직도 살아 있는 이발의 감각

서울 동작구 흑석동의 오래된 골목. 깨끗이 닦인 유리창 너머로 돌아가는 파란색과 빨간색의 회전등이 여전히 빛난다. 간판에는 큼직한 붓글씨로 ‘○○이용원’이 쓰여 있고, 문을 열면 고즈넉한 라디오 소리와 함께 이발용 의자 하나가 반긴다. 올해로 75세가 된 이발사 조용남 씨는 1969년부터 지금까지 이 자리를 지켜온 골목의 산증인이다. 그는 여전히 전동 커트기 대신 가위와 손끝 감각만으로 머리를 다듬는다.

AI가 얼굴형을 분석해 최적의 스타일을 추천하고, 자동 커트 기계가 오차 없는 대칭을 만들어내는 시대다. 그러나 조용남 씨는 말한다. “사람 머리는 숫자가 아니에요. 두상이 다르고, 머릿결이 다르고, 그날의 기분도 달라요. 그런 건 손으로 느끼는 거예요.” 그는 손님이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머릿결, 얼굴빛, 어깨의 긴장까지 관찰하며 머리 모양을 떠올린다.

그의 가위질은 빠르지 않다. 하지만 분명하고 섬세하다. 수십 년간 쌓인 감각이 손끝으로 이어지며, 각자의 두상에 맞는 곡선과 균형을 찾아낸다. 그는 손님에게 질문을 많이 하지 않는다. 대신,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기분과 피로를 읽어낸다. “어떤 사람은 조용히 있고 싶어 하고, 어떤 사람은 얘기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해요. 나는 그냥 거울 속 표정만 봐요.” 그의 이발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이해하는 손의 작업이다.

AI 시대 골목 이발사

단순한 커트가 아닌 기억을 다듬는 시간

조용남 씨의 이발소에는 세대를 넘나드는 단골이 많다. 아버지가 아이의 손을 잡고 처음 왔던 날부터 시작된 인연은, 어느새 그 아이가 어른이 되어 다시 자녀를 데려오는 시간으로 이어진다. “이 머리는 세 번째 대를 보고 있어요. 할아버지 머리도 내가 잘랐고, 손자 머리도 내가 자르고 있어요.” 그의 손끝에는 가족의 역사와 기억이 남아 있다.

그는 커트나 면도를 ‘형식’이 아니라 ‘기억을 전하는 일’이라 말한다. 한 번은 군대를 앞둔 청년이 찾아와 마지막으로 ‘어른답게 보이게’ 머리를 잘라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짧지만 단정한 형태로 머리를 다듬으며, 말없이 등을 두드려주었다. 또 한 번은 임종을 앞둔 노인이 마지막 면도를 부탁했다. “그분은 마지막 면도를 가족 앞에서 받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날 내 손이 많이 떨렸어요.” 그는 그 순간 이후, 자신의 기술이 단순한 이발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을 지켜주는 행위일 수 있다는 걸 실감했다.

이발소는 단순히 머리를 자르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장소다. 한 중년 남성은 회사에서 해고된 날, 아무 말 없이 이발소 문을 열고 들어와 머리를 맡겼다. 조용남 씨는 그에게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단지 조용히 머리를 감기고, 면도하고, 정성껏 머리를 다듬었다. “그 사람이 끝나고 고맙다고 한마디 했을 때, 나는 그게 위로였다는 걸 느꼈어요.”

면도칼에 깃든 섬세함, 기계가 흉내 낼 수 없는 손기술

조용남 씨의 손길은 이발뿐 아니라 면도에서도 진가를 발휘한다. 그는 수건을 삶아 직접 말리고, 매일 아침 면도칼을 정성껏 갈아 날을 점검한다. 거품을 손으로 올리고, 따뜻한 수건을 얼굴에 올려 피부를 이완시키는 방식은 전통적이지만 가장 안전하고 섬세하다. “면도는 날을 대는 게 아니라, 얼굴을 어루만지는 일이에요. 칼이 아니라 손이 닿아야 안심할 수 있죠.”

그는 얼굴의 굴곡과 턱선의 방향에 따라 칼을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전기면도기나 자동 클리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감각이다. “사람 얼굴은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해요. 컨디션에 따라 붓기도 있고, 피곤하면 피부가 예민해지죠. 그런 걸 눈으로 보고 손으로 느껴야 해요.” 그는 면도 중에도 손님의 호흡과 표정을 지켜보며, 작은 흔들림 하나에도 반응한다.

최근에는 젊은 남성들도 고전적인 면도 경험을 위해 그의 이발소를 찾는다. 수염을 정리하거나, 중요한 인터뷰를 앞두고 면도로 이미지를 정돈하려는 이들이 많다. “기계는 빠르고 정확하지만, 그런 섬세한 기분은 못 느끼게 하죠. 내 면도는 시간은 오래 걸려도, 사람 마음이 차분해지는 게 목적이에요.” 그는 면도를 단순한 미용이 아닌, 감정을 다스리는 예식처럼 여긴다.

그의 손끝에서 나오는 결과물은 단순히 잘 다듬어진 머리나 매끄러운 얼굴이 아니다. 그것은 ‘정리된 기분’이며, ‘돌봄을 받았다는 실감’이다. 이 모든 것은 기계가 제공할 수 없는, 사람의 손만이 줄 수 있는 감각이다.

AI 시대에 살아남는 ‘느림’의 가치

요즘은 예약부터 스타일 선택까지 모두 앱으로 이뤄지고, 자동 커트 기계가 세련된 디자인을 빠르게 완성하는 시스템이 많다. 바쁜 현대인들은 시간 절약을 우선시하고, 빠르고 정확한 서비스를 선호한다. 그러나 조용남 씨는 느린 속도 속에 있는 가치를 믿는다. “빨리 자르면 잘랐다는 기억만 남지만, 천천히 자르면 그 시간 자체가 추억이 돼요.”

그는 하루 손님을 많아야 다섯 명만 받는다. 모두 예약 없이 찾아오며, 기다림조차 반가운 일상으로 여긴다. “여기 오는 사람들은 머리보다 마음을 정리하러 와요. 가위 소리, 면도칼 긁히는 소리, 수건의 온기 같은 게 마음을 편하게 하거든요.” 그는 자신의 공간이 단순한 이발소가 아니라, 동네의 ‘쉼터’라고 표현한다.

후계자는 아직 없다. 이발사라는 직업을 낡고 불편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걱정보다는 지금 이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 “내가 사라지면 이 기술도 사라지겠지만, 괜찮아요. 내가 있을 때 최선을 다하면 그걸로 된 거죠.” 그는 지금도 매일 가위를 닦고, 수건을 삶고, 면도칼을 가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AI가 이발을 대신하고,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는 시대에도, 사람을 위한 손기술은 여전히 필요하다. 사람의 감정을 읽고, 삶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정성껏 머리카락 한 올을 다듬는 일. 골목 이발사의 마지막 손기술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따뜻한 행위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도, 누군가에겐 반드시 남아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