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 각인 시대에도 손으로 글자를 새기는 이유
서울 종로3가 낙원상가 인근, 빽빽한 간판과 LED 전광판 틈 사이로 눈에 띄는 작은 상점 하나가 있다. ‘삼덕인방(三德印房)’. 이 간판은 수십 년째 같은 자리에 붙어 있고, 유리문 안에는 손때 묻은 작업대와 붉은 인주, 칼, 붓, 그리고 도장들이 정갈하게 정리돼 있다. 77세 김남호 장인이 이곳에서 50년 넘게 도장을 새기며 살아왔다.
요즘은 대부분의 도장이 컴퓨터 각인기로 찍어 나온다. 도안도 AI가 자동으로 만들어주고, 기계는 몇 초 만에 글자를 조각해 낸다. 하지만 김 장인은 여전히 손으로 도장을 새긴다. “기계는 예쁘게는 잘해요. 근데 멋은 없어요. 글자가 살아 있으려면 손맛이 있어야 해요.” 그는 나무, 소뿔, 옥, 백 동, 사파이어 등 다양한 재질의 인장을 다루며, 도장 하나를 파는 데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하루가 걸린다.
그는 손에 익은 조각칼을 들어 글자를 하나하나 조각한다. 단순히 붓글씨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글자에 ‘기세’를 불어넣는 일이라고 한다. “획을 누를 때는 바닥을 긁고, 올릴 때는 날을 세워요. 손끝에 기운을 실어야 글자가 살아 움직여요.” 이 과정은 오직 경험과 감각으로 가능하다. AI가 그려낸 정형화된 디자인과 달리, 그의 글자는 사람의 인생이 묻어나는 인장으로 남는다.
한 자 한 자에 담긴 사람의 사연과 정성
수제 도장의 진짜 가치는 ‘의미를 담는 일’에 있다. 김남호 장인은 도장을 만들기 전, 반드시 의뢰인과 충분한 이야기를 나눈다. 어떤 용도로 쓰는 도장인지, 이름에 담긴 뜻은 무엇인지, 글자에 어떤 느낌을 담고 싶은지 등을 하나하나 묻는다. “그냥 이름만 알고선 못 새겨요. 그 사람의 마음마저 알아야 손이 따라가죠.” 그는 수십 년 동안 수천 개의 도장을 새겼지만, 같은 글자는 한 번도 없었다.
한 번은 40대 중반의 남성이 어머니의 유품으로 남은 도장을 리폼해달라며 찾아왔다. 그는 오래된 옥도장 위에 자신과 아들의 이름을 덧새기고 싶다고 했다. 김 장인은 기존 글씨를 살려내면서 새로운 글자를 조화롭게 배치했고, 그 도장은 가족의 유산으로 이어졌다. “그 도장은 그냥 인장이 아니라, 두 세대의 마음이 같이 들어간 거예요. 그런 건 절대 기계가 못해요.”
또 한 번은 작고한 작가의 필명을 새긴 도장을 요청한 유족이 있었다. 그는 그 필명을 단 한 획도 흔들리지 않게 조각하면서도, 글자의 선을 조금씩 갈라 시간의 흔적을 표현했다. “그 사람의 손 글씨 느낌을 남기려고 일부러 날카롭지 않게 했어요. 그게 기억이에요.” 그는 도장이 단순한 이름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을 담아내는 예술이라고 믿는다.
살아 있는 기술을 지키기 위한 하루하루
김남호 장인의 하루는 오전 8시에 시작된다.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먹을 갈고, 붓으로 글자를 쓰며 도안을 만든다. 그리고 조각칼을 쥐고 도장에 혼을 불어넣는다. 날카로운 칼끝은 종종 그의 손을 베기도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는다. “한 글자를 20분 넘게 파는 경우도 있어요. 근데 그렇게 해야 선이 살아 있어요. 급하게 하면 다 죽어요.”
작업 도중에는 절대 대화하지 않는다. 글자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각 중 한 번의 떨림은 도장 전체를 망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감각이 손끝에 집중돼야 한다. 그가 만든 도장은 단순히 깔끔한 것이 아니라, ‘손으로 완성된 유일한 조각’이다. AI가 만든 도장은 일관되지만, 감동은 없다. 그의 도장엔 손의 흔들림, 글자의 기세, 이름의 온도가 모두 담겨 있다.
하지만 생계는 쉽지 않다. 인터넷 주문이 줄고, 젊은 세대는 도장을 거의 쓰지 않는다. 대신 소수의 마니아층과 외국인 관광객, 전통문화에 관심 있는 이들이 그의 도장을 찾는다. 그는 최근 SNS를 시작했다. 손녀가 만들어준 계정으로 하루 한 번, 도장을 하나씩 소개하고 있다. “처음엔 부끄러웠는데, 도장을 예쁘다고 해주는 댓글 보니까 신기하고 좋아요.” 그의 도장은 느리고 작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AI 시대에도 살아남는 ‘한 글자의 품격’
김남호 장인은 자신이 평생 배운 기술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아직 진지하게 배워가겠다는 이가 드물다. “젊은 사람들은 도장을 찍는다는 것 자체를 몰라요. 그냥 사인만 하니까.” 그래서 그는 요즘, 남는 시간엔 글자 연구와 옛 인장 복원 작업을 하고 있다. “내 손이 멈추기 전에, 할 수 있는 건 다 해두고 싶어요.”
그는 손으로 조각한 글자의 품격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전자 서명이 아무리 많아도, 사람의 이름을 새긴 도장은 여전히 무게가 다르기 때문이다. “글자는 자기 얼굴이에요. 도장은 그 얼굴을 영원히 남기는 거고요.” 그는 그것이야말로 수공 도장의 존재 이유라고 강조한다.
AI가 모든 글자를 그려주고, 로봇이 인장을 각인하는 세상에도, 김 장인의 손은 멈추지 않는다. 도장은 더 이상 필수품이 아닐지 몰라도, 누군가의 이름에 담긴 이야기와 감정을 새기는 작업은 여전히 유일하다. 사람의 손으로 한 자 한 자를 파내는 이 고요한 작업은, 이름이라는 가장 개인적인 존재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오히려 이 디지털 시대에 더 깊은 울림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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