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가 찍어내지 못하는 한 잔의 온기
산속에서 불어온 바람이 대나무 숲을 흔드는 소리만큼 정직한 소리는 없다. 전남 담양, 그 대나무의 고장에서 40년 넘게 대나무 찻잔을 만들어온 장인이 있다. 올해 69세가 된 박진문 장인은 지금도 매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대나무를 손질하며 하루를 연다. 그가 만든 찻잔은 전통 다도 모임이나 차 애호가들 사이에서 ‘살아 있는 찻잔’으로 불린다.
박 장인은 기계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의 작업에는 전기톱도, 자동 연마기도 없다. 손도끼, 칼, 송곳, 줄 하나면 충분하다. “대나무는 살아 있는 재료예요. 톱날이 아니라 손끝으로 그 결을 느껴야 해요. 칼날이 조금만 삐끗해도 찻잔이 갈라지거나, 물이 새요.” 그는 대나무의 나이, 마디의 위치, 수분 함량까지 오로지 손과 눈으로 판단한다. 수치화된 데이터보다 오랜 시간 쌓인 감각이 그의 기준이다.
AI는 잔의 용량, 형태, 사용자의 손 크기 등을 계산해 가장 적절한 컵을 디자인해 낼 수 있다. 하지만 박 장인은 그런 계산을 하지 않는다. 그는 손에 들었을 때의 무게감, 입술에 닿았을 때의 감촉, 찻물이 퍼질 때의 울림 등을 먼저 생각한다. “찻잔은 눈으로 보는 게 아니에요. 손으로 잡고, 입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마시는 거예요.” 그는 찻잔 하나를 만드는 데 3일에서 5일이 걸린다. 그러나 그 잔은 단순한 용기가 아니라, 하나의 정성이다.

대나무에 담긴 계절과 사람의 손길
대나무 찻잔을 만들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계절’이다. 박진문 장인은 해마다 겨울 초입에만 대나무를 베러 간다. “겨울엔 대나무에 수분이 줄어들고, 해충도 덜하거든요. 그때가 가장 좋은 대나무가 나오는 시기예요.” 그는 산속에서 대나무를 고를 때, 색과 굵기뿐 아니라 뿌리의 흔들림과 잎의 결까지 살핀다. 이는 단순한 재료 선택이 아니라, 자연과 교감하는 과정이다.
대나무를 베어오면 그늘에서 1년 이상 건조한다. 급하게 말리면 갈라지고, 습기가 남으면 곰팡이가 생긴다. 박 장인은 건조 중에도 매일 상태를 확인하고, 마디마다 구멍을 뚫어 숨을 틔워준다. 이렇게 손질된 대나무는 하나하나 그 용도를 정한다. 굵은 대는 찻잔 몸통, 얇은 대는 손잡이, 마디는 바닥 면으로 쓰인다. “대나무는 처음부터 쓰임이 정해져 있어요. 그걸 내가 찾아주는 것뿐이에요.”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가면, 칼로 얇게 깎아 결을 맞추고, 내부를 파낸 후 모래로 갈아 마감한다. 그는 모든 찻잔을 한 방향으로만 깎는다. “결을 거슬러 깎으면 나중에 물이 새요. 대나무는 자른다고 되는 게 아니라, 길을 따라줘야 해요.” 이처럼 찻잔 하나에도 수많은 반복과 정성이 들어간다. 기계는 절대 구현할 수 없는 ‘시간의 흔적’이 박 장인의 찻잔에는 고스란히 담긴다.
찻잔에 담긴 감정과 기억, 그릇을 넘어선 의미
박진문 장인의 찻잔은 단순히 차를 담는 용기가 아니다. 그는 찻잔 하나에 ‘한 사람의 성격’과 ‘차를 마시는 태도’가 담긴다고 말한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무게감 있는 잔을 좋아하고, 조용한 사람은 얇고 가벼운 잔을 고르더라고요. 결국 찻잔도 사람을 따라가요.” 그래서 그는 의뢰받을 때마다, 손의 크기부터 생활 습관까지 묻는다. 그 사람을 이해해야 잔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한 번은 부부가 함께 사용할 찻잔 세트를 의뢰한 적이 있다. 박 장인은 남편의 잔은 묵직한 대를 써서 안정감을 주고, 아내의 잔은 가는 결로 가볍게 만들어 각자의 손에 맞게 조율했다. 그리고 두 잔이 서로 닿았을 때 ‘소리’가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찻잔끼리 부딪쳤을 때 맑은 소리가 나야 해요. 그게 같이 쓰는 잔의 예의예요.” 이처럼 그는 단순한 기능이 아닌, 관계와 분위기까지 고려한 찻잔을 만든다.
또 한 번은 돌아가신 할머니가 쓰던 대나무를 가져온 손녀가 찻잔으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박 장인은 무게가 부족해 어렵다 판단했지만,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마디를 잘라 두 개의 작은 잔을 만들었다. 그 손녀는 그 찻잔으로 차를 마실 때마다 할머니의 향기를 느낀다고 말했다. “그런 말 들으면 가슴이 벅차요. 내가 만든 게 그냥 물건이 아니었다는 거니까요.” 그에게 찻잔은 기억을 담는 그릇이자, 감정을 연결하는 매개체다.
AI 시대에도 손으로 만드는 그릇이 살아남는 이유
대부분의 사람은 이제 공장에서 찍어낸 스테인리스나 도자기 잔을 쓴다. 가격도 저렴하고, 디자인도 다양하다. 게다가 AI가 추천하는 ‘내 손에 최적화된 컵’은 클릭 몇 번이면 구매할 수 있다. 하지만 박진문 장인의 찻잔은 정반대다. 오래 걸리고, 똑같은 제품은 없으며, 손으로 다뤄야 유지된다. 그런데도 그를 찾는 사람은 꾸준하다. “기계는 똑같은 걸 잘 만들고, 나는 다른 걸 느리게 만들어요. 근데 사람들은 점점 그 ‘다름’을 찾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는 요즘 젊은 차인(茶人)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자연주의 다도, 로컬 수공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그의 찻잔도 ‘느림의 상징’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SNS를 통해 주문이 들어오고, 직접 공방을 찾아오는 이들도 많다. “예전엔 혼자였는데, 요즘은 차를 좋아하는 젊은 사람들 덕분에 내 기술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아요.” 그는 이 기술을 누구든 배우고 싶다면 기꺼이 전하겠다고 말한다.
박 장인의 꿈은 단순하다. “내 손이 멈출 때까지 대나무를 깎고, 누군가 그 찻잔을 들고 차를 마시는 걸 보면, 그걸로 된 거죠.” 그는 대나무와 함께 살아왔고, 찻잔으로 사람의 마음을 담아왔다. AI가 설계하고 프린트하는 시대에도, 그의 칼끝에서 태어나는 한 잔의 그릇은 여전히 사람을 향해 있다.
정성과 시간이 깃든 그 한 잔. 그건 기계가 줄 수 없는 온기이며, 사람이 만든 물건이 지닌 마지막 감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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