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보다 불을 가까이 두는 젊은 손, 유리와 마주한 인생
경기도 파주의 한 오래된 창고. 외부는 아무 표시도 없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금세 공방 특유의 뜨거운 공기와 섬세한 도구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33세 이지훈 씨가 유리 공예로 하루를 시작하고 끝내는 공간이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공방에 들어가 유리 공예를 배우기 위해 시작했고, 어느덧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유리와 함께 살아왔다.
AI가 예술 작품을 디자인하고, 자동 유리 성형 기계가 투명한 잔을 뽑아내는 시대. 그러나 그는 여전히 1,100도의 불 앞에 서서 유리를 불고 늘리고 굳히는 수작업을 고수한다. “유리는 살아 있는 재료예요. 손이 흔들리면 형태가 달라지고, 숨이 급하면 깨져요. 기계는 그걸 느끼지 못하죠.” 이지훈 씨는 유리를 ‘감정으로 다루는 물질’이라 말한다. 뜨거운 유리는 형태를 정하기 전까지 쉬지 않고 반응하기 때문에, 그 순간의 감각이 모든 결과를 좌우한다.
하루는 작업 전 손의 떨림을 가라앉히는 명상으로 시작된다. 불 앞에서 유리를 다루는 일은 한순간의 긴장으로도 치명적인 결과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는 무게 중심을 잡고, 유리 봉을 녹이며 천천히 회전시키고, 입으로 불어 부피를 조절한다. 기계는 동일한 크기의 컵을 수백 개 만들지만, 그는 하루에 두세 개밖에 만들지 못한다. “그 대신 하나하나 표정이 있어요. 같은 디자인이지만 손이 다르면 다르게 나와요.”
유리를 다루는 감각, 자동화로 대체할 수 없는 기술
유리 공예는 단순히 예쁘고 섬세한 공예가 아니다. 재료 자체가 까다롭고, 다루기 어려우며, 실패율이 높다. 이지훈 씨는 하루 중 절반을 ‘실패한 유리 조각’을 정리하는 데 보낸다. “유리는 자기 마음대로 깨져요. 형태가 조금만 불안정해도 식으면서 터지고, 접합이 미세하게 틀어져도 갈라져요.” 기계는 이런 부분을 자동 조절로 보완하지만, 그는 오직 눈과 손의 감각에 의존한다.
그는 유리를 자르지 않는다. 대신 녹이고 구부려 원하는 형태를 만든다. 컵 하나를 만들기 위해 불로 녹인 유리 봉을 천천히 회전시켜 둥글게 부풀린 뒤, 얇은 금속 도구로 입구를 정리하고, 송풍기로 안쪽을 다듬는다. “불의 세기, 손의 속도, 회전 각도, 입김의 양—all 손으로 느끼고 조절해요. 한 동작이 어긋나면 다시 처음부터예요.” 기계는 이 모든 요소를 수치화할 수 있지만, 예술적 감각은 여전히 사람 손안에 있다.
특히 그는 ‘손의 감각’을 가장 중요한 도구로 여긴다. 온도가 아닌 색으로 열기를 읽고, 무게가 아닌 질감으로 균형을 판단한다. “유리는 빛을 반사하잖아요. 그 반짝임을 보면서도 내부의 흐름을 읽어야 해요.” 이는 수치로 기록할 수 없는 영역이며, 손과 눈의 조율이 만든 경험의 총합이다. 그는 유리 표면의 미세한 균열을 손가락으로만 감지해 낸다. 기계는 발견하지 못한 ‘이상’을, 그는 손끝으로 알아낸다.
수공 예술로 생계를 잇는다는 것의 의미
예술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유리 공예처럼 위험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수공업은 더욱 그렇다. 이지훈 씨는 매달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소품 위주의 제품을 제작하고, 주말에는 벼룩시장에 참가한다. 컵, 접시, 작은 오브제 등 가격대가 낮은 실용 공예품을 중심으로 작업을 이어가지만, 이 안에도 예술적 정체성을 담으려 애쓴다. “쓰는 사람의 손에 닿는 순간까지 생각해서 만들어요. 그냥 예쁜 건 오래 안 가요. 손에 맞아야 해요.”
그는 매출을 높이는 대신, 자기 기술을 유지하는 쪽을 선택했다. 빠르게 대량 생산하지 않고, 오더 메이드 주문을 받으며, 고객과의 대화를 중요시한다. 한 번은 한 고객이 손이 불편한 어머니를 위해 특별한 손잡이 모양의 유리컵을 요청했다. 그는 수십 번의 시도 끝에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걸리는 컵을 완성했고, 그 어머니는 식사 때마다 그 컵을 쓴다고 했다. “그때 느꼈어요. 내가 만든 유리가 누군가의 일상에 들어간다는 거요.”
기계는 불량률을 줄이고, 정확한 상품을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지만, 그는 실패를 감수하는 예술을 택했다. “하루 종일 일해서 컵 하나밖에 못 건질 때도 있어요. 하지만 그 하나가 어떤 사람에겐 꼭 필요한 물건이 될 수 있죠.” 그는 이 작업이 ‘소비’가 아닌 ‘공감’을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유리는 차갑지만, 그 안에 담긴 손의 감각은 따뜻하다. 그래서 고객은 다시 그를 찾는다.
유리를 지키는 청년 장인의 기술과 삶
이지훈 씨는 자신을 예술가라 부르지 않는다. 그는 ‘기술자’라는 표현을 더 좋아한다. “나는 손으로 먹고사는 사람이에요. 예술은 나중에 붙는 말이고, 먼저는 손의 기술이죠.” 그는 매일 유리의 무게를 어깨로 느끼고, 손바닥으로 온도를 재며, 팔목으로 회전의 속도를 조율한다. 이 모든 과정은 몸이 기억한 감각이며, 데이터나 설계 없이도 가능한 일이다.
그는 앞으로도 유리 공예를 계속할 계획이다. 수강생을 조금씩 받고, 그의 기술을 배우려는 젊은이에게 도구와 공간을 나눠준다. “이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기계가 다 하니까요. 근데 그럴수록 손으로 만든 유리는 더 소중해질 거예요.” 그는 손으로 만든 유리 제품이 단순히 물건을 넘어서 ‘감정을 담는 그릇’이 되기를 바란다.
AI가 디자인을 만들고 자동 성형으로 유리를 찍어내는 시대에도, 이지훈 씨는 매일 불 앞에 선다. 기계보다 느리고, 효율보다 비효율적인 그의 방식은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유리는 절대 거짓말을 안 해요. 손이 떨리면 형태가 흔들리고, 마음이 급하면 깨져요. 그래서 매일 나 자신을 먼저 다듬어야 해요.”
그의 유리 작업은 단순히 예쁜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손과 불, 그리고 사람의 감정을 함께 녹여내는 과정이다. 그래서 오늘도, 그는 천천히 유리를 불고 있다. 기계는 정확하지만, 사람의 손은 감동을 만든다.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 카테고리의 다른 글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수제 도장 파는 가게의 살아있는 역사 (0) | 2025.07.06 |
---|---|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손바느질로 만든 한 땀의 아름다움 (0) | 2025.07.06 |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나무 장난감 만드는 70세 노장 이야기 (0) | 2025.07.05 |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금속공예 수업을 20년째 운영하는 기술자 (0) | 2025.07.05 |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구두 수선 장인의 하루 밀착 인터뷰 (0) | 2025.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