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천연염색 장인이 말하는 색의 의미

mystory54590 2025. 7. 7. 19:41

디지털 색상이 지우지 못한 자연의 색

2025년 현재, 색은 숫자로 환산되고 있다. 패션 브랜드는 AI가 제안한 트렌드 색을 따라 움직이고, 디지털 그래픽 도구는 정확한 색상 값으로 일관된 결과물을 만든다. HEX 코드, RGB 값, CMYK 수치는 이제 색의 본질을 정의하는 공식 언어처럼 쓰이고 있다. 그러나 충북 괴산의 산자락 아래, 여전히 꽃잎과 나무껍질을 달여 색을 우려내는 사람이 있다. 천연염색 장인 박연화 씨(68)는 “색은 숫자가 아니라 숨결”이라고 말한다.

박 장인의 공방은 마치 식물 실험실 같다. 항아리 속에는 치자, 쪽, 감, 오배자, 양파껍질, 홍화잎이 발효되고 있고, 나무 선반에는 말리고 있는 천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다. 그녀는 이곳에서 30년 넘게 천연염색을 해오고 있다. “천연염색은 정해진 공식이 없어요. 같은 재료도 매번 달라요. 그날의 바람, 온도, 내 기분까지 색에 영향을 줘요.” 기계가 아무리 정교해도 이 불확실함, 이 우연성은 따라올 수 없다. 그래서 천연염색은 느림의 예술이고 감각의 기술이다.

쑥은 봄에, 감잎은 여름에, 밤껍질은 가을에 가장 깊은 색을 낸다. 박 장인은 그런 계절의 흐름을 손으로 체득해 왔다. "봄에 우려낸 쪽물은 연하고, 가을엔 깊은 남청색이 나와요. 내가 색을 만드는 게 아니라, 자연이 색을 내는 거죠. 나는 그걸 도와주는 사람일 뿐이에요." 그녀는 하루의 대부분을 항아리를 저으며, 천을 담갔다가 건지고, 볕에 널며 색을 읽는다. 손끝으로 물의 온도와 염료의 밀도를 느끼는 일은 디지털 시대와는 무관한, 그러나 오히려 더 가치 있는 기술로 다가온다.

AI 시대 천연염색 장인

손으로 우려낸 색이 담고 있는 이야기

천연염색이 다른 염색 방식과 가장 다른 점은 ‘완벽하게 똑같은 결과가 나올 수 없다는 점’이다. 박연화 장인은 이를 불편이 아닌 매력이라 말한다. “고객들은 처음엔 색이 균일하지 않다고 당황해요. 근데 나중엔 그 얼룩이 좋아졌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손으로 만든 증거니까요.” 기계는 오류를 제거하지만, 사람은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그 흔적이 기억을 만든다.

그녀가 다루는 색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건 감물이다. 감으로 물든 색은 묘하게 고동색과 회갈색 사이에 머무르며, 시간이 지나면 마치 세월이 스며든 듯 은은하게 변한다. “감물은 처음엔 밋밋해 보여도, 오래 입을수록 몸에 익어요. 햇볕을 쬘수록 깊어지고, 손이 닿을수록 부드러워지죠.” 그녀는 감물 색 천을 ‘시간과 함께 자라는 옷’이라 부른다.

어느 날, 한 고객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손수건을 가지고 왔다. 그 손수건은 박 장인이 15년 전 만든 감물 손수건이었다. 고객은 말없이 손수건을 보여주며 새로운 감물 천을 부탁했다. 박 장인은 같은 천을 만들 수 없음을 알지만, 최대한 비슷한 감, 바람, 빛을 기억하며 천을 염색했다. “똑같지는 않아도 그 감정은 닮았다고 하더군요. 그게 천연염색이에요. 사람의 기억을 색으로 다시 꺼내는 일.” 이런 순간이야말로 그녀가 이 일을 놓지 않는 이유다.

몸에 닿고 마음에 남는 ‘진짜 색’

디지털 프린팅, 산업용 염색, 대량 생산 시스템은 더 빠르고 효율적이며 정교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박연화 장인이 만든 천은 조금 다르다. 색이 고르지 않고, 마감도 일정하지 않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녀의 천을 찾는다. 이유는 하나다. “이건 몸에 닿았을 때 편하고, 시간이 지나도 질리지 않아요. 그건 사람 손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유아용 기저귀, 순면 천, 커튼, 스카프 등 실생활에 바로 쓸 수 있는 제품을 중심으로 작업한다. 특히 치자색은 어린이 제품에 인기가 많다. “화학 염료는 세탁 후에도 냄새가 남거나 피부 트러블이 생기는데, 천연염색은 아이들이 편해해요. 가끔은 엄마들이 고맙다고 울면서 전화해요.” 그녀에게 이 일은 생업이자 누군가의 삶을 지켜주는 일이다.

색은 시각만의 영역이 아니다. 냄새, 감촉, 심지어 소리처럼 작동할 수 있다. 박 장인은 이를 ‘색의 다 감각성’이라 부른다. “쪽으로 염색한 천은 햇빛을 받으면 은은한 풀냄새가 나고, 감물은 비가 오는 날엔 더 깊은 색을 보여줘요.” 이 감각들은 기계로 측정할 수 없다. 그것은 사람이 자연과 함께 살면서 얻은 감각이고,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다.

AI 시대에도 색은 여전히 사람의 영역

AI는 빠르게 학습하고, 색채 이론을 통합 분석하며, 시대 흐름에 맞는 색을 제안한다. 컬러 마케팅도 AI 알고리즘을 통해 진화했고, 트렌드 색상은 매 시즌 데이터 기반으로 정해진다. 그러나 박연화 장인은 그런 흐름을 따르지 않는다. “색이 왜 트렌드를 따라가야 하죠? 오늘 내가 기분 좋은 색이 가장 필요한 색이에요. 그게 사람의 색이에요.”

요즘 그녀는 마을 사람들과 염색 수업을 진행한다. 어린아이부터 은퇴한 어르신까지, 모두가 함께 나무껍질을 삶고, 천을 담그고, 햇볕에 널어 말린다. “누구나 손에 물이 들어야 색을 이해해요. 그냥 보는 건 모니터 색이죠. 내 손이 만들면 그건 기억이에요.” 그녀는 이 수업을 통해 천연염색이 단순한 공예가 아니라, ‘몸의 언어’가 될 수 있음을 전하고 있다.

후계자 이야기를 꺼내자 박 장인은 조심스럽게 웃었다. “젊은 사람들은 이게 너무 느리고 고생스럽다고 해요. 맞아요. 돈도 안 되고 손도 아파요. 근데 이걸 하면, 세상이 조금 더 다르게 보여요. 색이 달라져요. 그걸 보는 사람이 있다면, 이 기술은 계속 살아 있을 거예요.” 그녀는 지금도 하루에 세 번 손을 물에 담근다. 아침엔 감물을, 점심엔 쪽물을, 저녁엔 치자를 만진다. 그 손끝에서 매일 다른 색이 태어난다.

AI가 색을 계산하고 출력하는 시대. 그러나 진짜 색은 여전히 사람의 감각에서 비롯된다. 천연염색은 느리고 고되고 불확실하지만, 그 안에는 사람이 살아 있다. 박연화 장인이 말하는 ‘색의 의미’는 곧 사람이 자연과 함께 호흡한 시간의 깊이이며, 그 시간은 결코 인공지능이 복제할 수 없는 고유한 아름다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