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음보다 정교한 손끝에서 태어나는 소리
서울 마포구의 오래된 건물 2층. 간판도 없는 그 공간에서 맑은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한 음, 한 음이 마치 사람 손끝에서 튕겨 나온 듯, 온기와 울림을 머금고 있다. 이곳은 41세 기술자 윤지환 씨가 운영하는 수제 오르골 공방이다. 그는 지금도 모든 오르골을 손으로 조립하고, 음 하나하나의 울림을 귀로 조율하며 하루를 보낸다.
오르골은 더 이상 대중적인 물건은 아니다. 디지털 음악이 손쉽게 소비되고, AI 작곡 기술이 등장한 오늘날, 오르골의 존재는 낡은 감성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윤지환 씨는 말한다. “오르골은 단순한 음악 장치가 아니에요. 기계 안의 시간, 감정, 기억이 들어 있어요. 손으로 만드는 건 그 감정을 조율하는 일이죠.” 그는 직접 금속 실린더에 핀을 하나하나 심고, 리드(금속 혀)를 맞추며 멜로디를 만든다.
AI는 음정과 박자를 정교하게 계산해 디지털 오르골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수제 오르골은 미세한 오차, 손의 압력, 금속의 반응을 감지하면서 만들어진다. 윤지환 씨는 “오르골이 똑같이 울리면 그건 기계고, 조금씩 다른 울림이 있어야 사람 음악이죠”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같은 곡을 두 개의 오르골에 심어도, 각각의 소리를 다르게 튜닝한다. 그에게 오르골은 조립이 아닌, 조율이다.
작은 나사 하나에도 담긴 감각의 기술
윤지환 씨의 하루는 손가락 운동으로 시작된다. 0.5mm 단위의 나사와 기어를 다루는 작업은 손의 민감한 감각
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그의 공방에는 수백 개의 부품이 정갈하게 정리돼 있고, 종류만 해도 실린더, 리드, 케이스, 회전축, 감는 키, 톱니바퀴, 진동판까지 다양하다. 그 모든 부품을 손으로 맞추고, 조율하고, 연결한다.
오르골 조립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은 ‘핀 작업’이다. 실린더에 박혀 있는 작은 핀들은 각각 하나의 음을 낸다. 윤지환 씨는 음악의 악보를 바탕으로 핀의 간격과 높이를 설정하고, 금속망치로 한 개씩 박아 넣는다. “0.2mm만 틀어져도 전체 멜로디가 어긋나요. 손끝의 감각이 정확하지 않으면 좋은 소리가 안 나와요.” 이 작업은 아무리 숙련돼도 기계처럼 빨리할 수는 없다. 오히려 서두를수록 소리가 흐트러진다.
조립을 마친 오르골은 바로 연주하지 않는다. 윤지환 씨는 오르골을 하루 동안 ‘쉬게’ 만든다. 금속이 서로 맞물리는 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후 그는 귀로 하나하나의 음을 들어보며 조정한다. 어떤 음은 리드의 장력을 줄이고, 어떤 음은 핀을 아주 살짝 돌린다. “AI는 음이 맞는지만 확인하겠지만, 나는 감정을 듣죠. 너무 뾰족하면 부드럽게, 너무 느리면 리듬을 살려줘야 해요.” 이 감각은 오직 손과 귀로 전해지는 정밀한 기술이다.
기억을 담아 조율하는 음악상자
수제 오르골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누군가의 사연을 담는 도구다. 윤지환 씨는 단순히 제작자가 아니라, ‘기억을 맞추는 사람’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그는 고객의 요청에 따라 맞춤 오르골을 제작하며, 종종 고인의 음성을 오르골로 재현하거나, 오래된 자장가를 멜로디로 새긴다. “하나의 오르골엔 가족의 추억, 연인의 고백, 자녀의 첫 기억 같은 감정이 들어 있어요.”
그는 한 번은 청각장애를 가진 아버지를 위한 오르골을 만든 적이 있다. 아버지는 소리를 들을 수 없지만, 오르골의 진동은 손끝으로 느낄 수 있었다. 윤지환 씨는 저음 중심의 멜로디를 제작해 진동이 더 잘 느껴지도록 조율했고, 케이스를 나무 대신 얇은 금속판으로 제작해 울림을 극대화했다. “그분이 오르골을 손에 올리고 미소를 지을 때, 이 기술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는 걸 다시 느꼈어요.”
또 한 번은 고인이 된 어머니가 생전에 자주 불렀던 민요를 오르골로 제작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는 민요 음계를 직접 전사해 금속 핀을 하나하나 박았고, 그 가족은 그 오르골을 유품으로 보관했다. “음악은 기억이에요. 오르골은 그 기억을 반복해서 꺼내는 장치죠. 그래서 나는 소리를 만들면서, 동시에 감정을 조율하고 있어요.”
AI 시대에 여전히 사람의 손이 만드는 울림
디지털 기술은 이미 음악 제작의 방식 자체를 바꿔놓았다. 작곡도, 연주도, 혼합도 인공지능이 대신할 수 있다. 오르골조차 앱으로 작동하는 시대다. 그러나 윤지환 씨는 말한다. “기계가 음악을 만드는 시대니까, 오히려 손으로 만든 음악이 더 귀해졌어요. 오르골이 느린 건 단점이 아니라, 그것만이 줄 수 있는 경험이죠.”
그는 젊은 세대를 위해 오르골 조립 워크숍도 연다. 음악 전공자뿐 아니라, 수공예에 관심 있는 일반인들도 많이 참여한다. 처음 나사를 고정하고, 실린더를 돌려보며 “소리가 난다!”고 감탄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윤지환 씨는 이 기술의 미래를 본다. “디지털 세대도 결국 손으로 뭔가를 만들고 싶어 해요. 음악을 느끼는 방식은 변했지만, 감동을 원하는 마음은 똑같아요.”
그는 최근 작은 브랜드를 만들어 온라인으로 주문도 받고 있다. 이름은 ‘울림 工房’. “공장에서 찍어낸 음이 아니라, 사람 손에서 만들어진 음을 전하고 싶어서 지은 이름이에요.” 그가 만드는 오르골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가격도 저렴하진 않지만, 하나하나가 ‘작은 음악 작품’으로 불린다.
AI가 멜로디를 출력해도, 그 울림을 사람의 감정으로 다듬을 수 있는 이는 손기술을 가진 기술자다. 윤지환 씨의 오르골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기억과 감정을 담은 울림이다. 그래서 그의 하루는 여전히 조용한 공방에서, 천천히 울리는 한 음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 한 음이 누군가의 삶에 오래도록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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