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한지 등불 만드는 장인의 손과 마음

mystory54590 2025. 7. 10. 22:44

전기를 이긴 빛, 한지 등불이 비추는 시간

현대인의 일상은 밝다. 스마트폰 화면, LED 조명, 자동 감지 등까지. 밤에도 어둡지 않은 도시에서 사람들은 언제든 버튼 하나로 빛을 만든다. 그러나 충청북도 괴산의 조용한 마을, 작은 작업실 안에는 전기보다 느리고, 디지털보다 따뜻한 빛이 존재한다. 바로 장인 김형구 씨(65)의 손에서 태어나는 한지 등불이다. 그는 지난 30년간 오직 손으로 등불을 만들어온 사람이다.

김형구 씨가 만드는 등불은 전통 한지를 바탕으로 나무 골격을 짜고, 그 위에 풀칠로 천천히 종이를 입혀가며 완성된다. 전기 조명을 위한 기능성보다는, 빛이 퍼져 나가는 감도와 결, 그림자의 모양을 고려해 만든다. “한지 등불은 밝은 게 목적이 아니에요. 조용히 공간을 감싸는 거죠. 어둠을 없애기보단, 어둠과 어울리는 빛을 만드는 거예요.” 그는 조명의 역할을 기술이 아닌 ‘정서’로 바라본다.

디자인은 일정한 틀 없이 그의 손이 기억하는 전통에서 비롯된다. 사각, 육각, 원형의 등골을 손으로 짜고, 종이의 방향을 조정하며 빛의 흐름을 설계한다. “같은 종이라도 결이 다른 한지에선 빛의 퍼짐이 달라요. 한지를 거슬러 붙이면 그림자가 날카롭고, 결을 따라가면 부드럽죠.” 이런 감각은 수치나 설계도가 아닌, 오랜 시간 손이 쌓아온 기억에서 나온다. 그는 오늘도, 종이를 만지며 빛의 흐름을 손으로 읽는다.

AI 시대 한지 등불 만드는 장인

한지와 나무, 풀과 손이 만나 만들어내는 온기

한지 등불은 간단해 보이지만, 그 제작 과정은 섬세함과 인내의 연속이다. 가장 먼저, 등불의 뼈대를 만드는 작업부터 시작된다. 그는 얇은 나무 살을 직접 깎고 휘게 만들며 원하는 형태를 잡는다. 직선과 곡선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위해선, 나무의 탄성까지 계산해야 한다. “나무가 말려 있거나, 건조 상태가 다르면 금방 틀어져요. 손으로 만져서 온도와 습도를 읽어야 해요.”

다음은 한지를 고르고 자르는 작업이다. 그는 무조건 전통 닥나무 한지만을 고집한다. 인쇄용 한지와는 결이 다르고, 빛을 통과시키는 느낌도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한지는 살아 있어요. 햇살에 따라 색이 달라지고, 습기에 따라 질감이 변해요. 그래서 붙이는 날의 날씨에 따라 등불이 달라지죠.” 종이를 잘라내고, 곱게 풀칠해 뼈대 위에 붙여야 하는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손의 섬세함이다.

그는 풀도 시중 접착제가 아닌 전통밀 풀을 쓴다. 풀 농도에 따라 종이가 울거나 들뜨기 때문에, 날마다 물의 온도와 농도를 바꿔가며 손수 끓인다. “밀 풀은 처음엔 잘 안 붙지만, 마르고 나면 튼튼해져요. 빨리 만들려고 하면 안 돼요. 등불은 기다리는 공예예요.” 이처럼 등 하나가 완성되기까지 수일이 걸리며, 그 속엔 온도, 바람, 종이의 결, 손의 압력까지 복합적인 요소가 스며든다.

기능을 넘어 기억을 담는 빛

김형구 씨의 등불은 단순한 조명이 아니다. 그는 등불 하나에 사람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고객들은 종종 특별한 날을 위한 등불을 의뢰하거나, 돌아가신 부모님의 한복 천으로 장식된 등을 요청하기도 한다. “빛이 단순히 밝히는 게 아니라, 기억을 끌어올리는 도구가 되기도 해요. 어릴 적 아궁이 옆 등잔 불빛을 기억하는 분도 많고요.” 그는 등불을 ‘기억을 붙잡는 그릇’이라 표현한다.

어느 날은 50주년을 맞은 부부가 직접 젊은 시절 함께 입었던 옷의 천을 가져와 등불로 만들고 싶다고 요청했다. 그는 그 천을 종이와 섞어 겹 등을 만들어 드렸고, 그 부부는 그 등불 아래에서 자녀들과 함께 식사했다고 전했다. “그걸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더군요. 그런 등불은 어디에도 없어요.” 그가 만드는 빛은 단순히 눈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위한 빛이다.

최근에는 명상센터, 전통찻집, 개인 힐링 공간에서도 그의 등불을 찾는다. 인위적인 LED 조명이 주지 못하는 부드러운 빛과 따뜻한 그림자는,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 쉼표가 되어준다. “조명이 공간을 바꾸는 게 아니라, 조명이 사람의 상태를 바꾸는 거죠. 그게 한지 등불이 가진 힘이에요.” 이처럼 그는 등불을 통해 공간의 분위기뿐 아니라, 사람의 감정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AI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을 ‘손의 빛’

오늘날 조명은 더 똑똑해지고 있다. AI 기반 조명은 공간의 밝기를 분석해 자동으로 조도를 조절하고, 사용자의 기분을 분석해 색온도까지 바꿔준다. 하지만 김형구 씨는 그럴수록 오히려 ‘느리고 불완전한 빛’이 더 절실해진다고 말한다. “요즘 조명은 정확하긴 한데, 너무 차가워요. 내 등불은 틀어져 있고, 흐리고, 그림자가 있죠. 근데 그래서 따뜻한 거예요.”

그는 AI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한지에 풀칠할 때의 손의 떨림이나 종이에서 퍼지는 냄새까지는 담을 수 없다고 말한다. “종이붙이다가 갑자기 비가 오면 풀 냄새가 달라져요. 그걸 기계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의 말에는 수치로 표현할 수 없는 감각과 감정이 담겨 있다. 등불 하나에도 날씨, 기분, 바람의 방향까지 함께 담기기에, 똑같은 등은 두 번 다시 만들 수 없다.

김형구 씨는 자신의 기술이 언젠가는 사라질 수 있음을 안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남긴 빛이 누군가의 기억에 남으면 돼요. 전기 꺼도 그 사람 마음에 남는 빛, 그런 걸 만들고 싶어요.” 그는 오늘도 한지를 꺼내고, 풀을 덥히고, 뼈대를 다듬으며 다음 등불을 준비한다.

AI가 만드는 정확한 조명 속에서도, 사람의 손에서 나온 등불은 여전히 사람 곁에 머물러 있다. 불완전하고 흔들리는 빛.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정성과 기억은 기술이 대체할 수 없는 인간적인 온기다. 그것이 바로 한지 등불 장인이 손으로 만든 ‘진짜 빛’의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