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종이접기로 삶을 지탱하는 작가의 하루

mystory54590 2025. 7. 11. 23:30

종이 한 장에 담긴 세계, 손끝에서 피어나는 형상

서울 은평구의 한 조용한 골목, 오래된 주택을 개조한 작은 작업실 안. 정갈하게 쌓인 종이 뭉치 사이에서 손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가위도 풀도 없다. 오직 손가락의 감각만으로 종이를 꺾고 접는 행위가 계속된다. 올해 마흔넷, 종이접기 작가 정민서 씨는 지난 15년 동안 종이 하나로 생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는 오늘도 종이 위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종이접기는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해봤던 놀이지만, 정민서 씨에게는 삶의 방식이자 예술이다. “종이는 가장 단순한 재료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재료예요. 칼이나 도구 없이도, 접기만으로 구조가 생기고, 감정이 생기죠.” 그는 평면의 종이가 입체로 변하는 찰나의 감각을 사랑한다. 그 감각은 설계가 아니라 손의 기억에서 비롯된다.

종이의 질감, 두께, 습도에 따라 접는 방식은 달라진다. 얇은 일본화지, 러프한 크래프트지, 광택 있는 색지까지 종이에 따라 나비의 날개는 더 가볍거나 단단하게, 꽃은 더 섬세하거나 강렬하게 접힌다. “기계는 종이를 재단하겠지만, 손은 종이와 대화해요. 내가 힘을 얼마나 주느냐에 따라 접힌 선이 달라지니까요.” 종이는 단순히 결과를 위한 재료가 아니라, 함께 움직이고 결정하는 존재다.

AI 시대 종이접기로 삶을 지탱하는 작가

기술보다 느린 예술, 그 안에 담긴 사람의 시간

정민서 작가의 작업은 하루에 몇십 개씩 쏟아지는 게 아니다. 꽃 한 송이, 새 한 마리를 완성하는 데에도 몇 시간이 걸린다. 디자인 단계부터 접기 순서를 수십 번 실험하며 완성도를 높이기 때문이다. “접기라는 건 하나의 실수도 허용하지 않아요. 한 번 잘못 접으면 그 자국이 평생 남아요. 그래서 천천히, 천천히 해야 해요.” 그는 종이 하나를 접기 전에도 종이를 손바닥에 문질러보며 그날의 컨디션을 확인한다.

그가 만든 작품들은 단순한 종이 공예를 넘어, 전시 작품이 되거나, 결혼식 장식, 아이들 교육용 교구로 활용된다. 최근엔 치매 환자들을 위한 ‘접기 치료 키트’를 개발해 복지관과 연계하고 있다. “종이접기는 손과 눈, 머리를 동시에 써야 해서 치매 예방에 효과적이에요. 그리고 완성하면 작은 성취감이 있죠.” 그는 종이를 접는 행위가 단지 형태를 만드는 걸 넘어, 마음을 다독이는 과정이 될 수 있음을 믿는다.

한 번은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종이로 만든 작은 천사 조각을 선물한 적이 있다. 그 부모는 정민서 씨에게 편지를 보내 “가슴속에 묻었던 아이가 날아오른 것 같았다”고 적었다. “그 순간, 제가 하는 일이 단지 종이 장난이 아니라는 걸 느꼈어요. 제 손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죠.” 그 기억은 지금도 작업 중 가장 힘이 되는 원동력이다.

AI가 흉내 낼 수 없는 손의 흐름

오늘날 AI는 종이접기에도 활용되고 있다. 접기 구조를 자동으로 계산해 주는 알고리즘, 3D 접기 시뮬레이션, 디지털 종이 모형 설계 도구가 개발되면서 종이접기의 정밀도는 급격히 향상됐다. 하지만 정민서 씨는 그런 흐름을 받아들이면서도, 손의 감각이 빠질 수 없는 이유를 강조한다. “AI는 구조를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그 구조에 감정을 넣을 순 없어요.”

그는 종이접기를 단순한 디자인이 아니라 ‘감정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내가 오늘 피곤하면 꽃잎도 구겨지고, 내가 기쁘면 종이도 더 부드럽게 접혀요. 손이 마음을 따라가요. 그래서 똑같은 패턴으로 접어도 매번 결과가 달라요.” 기계는 완벽한 대칭을 만들 수 있지만, 사람 손은 의도치 않은 흔들림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만든다.

그는 종이 위에 일부러 주름을 넣는 경우도 있다. 완벽한 면보다, ‘살아 있는 결’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종이는 사람과 닮았어요. 주름이 있어야 진짜예요. 너무 반듯하면 차갑고, 너무 일정하면 금방 질리죠.” 이런 감각은 코드나 도면이 아니라, 손끝의 감정으로만 전해질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디지털 시대에도 ‘사람 손이 만든 종이접기’가 반드시 살아남을 거라고 믿는다.

종이 한 장으로 삶을 버티는 사람의 기술

정민서 작가는 여전히 하루의 대부분을 책상 앞에서 보낸다. 접는 종이의 수는 적지만, 그 안에 담긴 시간은 깊고 묵직하다. “종이는 비싸지 않지만, 접는 시간은 값으로 따질 수 없어요. 그게 종이접기의 역설이자 매력이에요.” 그는 빠르게 소비되는 콘텐츠 시대에서, 한 장의 종이로 만들어지는 느린 결과물을 통해 균형을 찾는다.

요즘은 청년 창업자들이 종이접기 기반 상품을 개발하거나, 유아 콘텐츠 회사와 협업하는 경우도 많다. 그는 그 흐름을 반기면서도 이렇게 덧붙인다. “기술은 분명 편리해요. 하지만 모든 게 편리해지면, 감정도 무뎌져요. 저는 불편한 감정까지도 껴안는 종이를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그의 종이접기는 늘 감정의 무게를 지닌다.

AI가 구조를 분석하고, 완벽한 결과물을 출력하는 시대다. 하지만 종이 한 장을 손으로 만지고, 접고, 펼치고, 다시 눌러가며 형태를 만들어내는 사람의 손은 아직도 살아 있다. 그 손은 실패도 하고, 주름도 만들고, 때로는 찢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결과물은 단순한 공예품이 아닌, 한 사람의 삶의 흔적이 된다.

정민서 작가는 말한다. “종이 한 장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것으로 매일을 버틸 수 있어요. 손이 기억하는 감정이 있으니까요.” 오늘도 그는 종이를 꺼내고, 접고, 숨을 고르며 또 하나의 작은 세상을 접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