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조각 위를 걷는 이야기, 바느질로 완성된 한 줄의 감성
경기도 파주의 한 골목, 출판 단지와 인쇄소 사이에 위치한 조용한 작업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실과 바늘이 천을 통과하는 ‘슥슥’ 소리가 정적을 채운다. 올해로 12년째, 이곳에서 오직 바느질로 책갈피를 만드는 작가 이나경 씨(41)는 하루도 빠짐없이 책 속에 담을 감정을 천 조각에 꿰매고 있다. 그녀는 자신을 ‘침묵하는 이야기꾼’이라 부른다. 말 대신 바느질로, 문장 대신 자수로 누군가의 기억을 남기는 사람이다.
이나경 작가의 책갈피는 단순한 문구용품이 아니다. 한 땀 한 땀 손으로 만든 그 조각들은 독자의 취향과 기억, 책의 내용과 분위기를 반영한 ‘작은 감정의 조각’이다. “책을 읽는 시간은 대부분 조용하잖아요. 저는 그 조용한 순간에 함께 머무는 존재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녀의 책갈피는 기성품처럼 일률적이지 않다. 어떤 건 해질녘 하늘색 천 위에 꽃을 수놓았고, 어떤 건 낡은 셔츠 조각에 글귀를 자수로 새겼다. 그 조합에는 반드시 ‘그 사람을 위한 이유’가 담겨 있다.
하루 평균 제작량은 3개. 공장에서라면 수십 배는 빠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느림을 즐긴다. “책이 빨리 읽는 것보다 천천히 음미해야 하듯, 책갈피도 그래야 진짜 의미가 있거든요.” 그녀는 작업을 시작하기 전, 의뢰인의 메일이나 편지를 읽고, 책을 한두 장이라도 넘겨본다. 어떤 책이든 그 책의 분위기, 추천한 이유, 선물하는 사람의 감정까지 읽고 난 뒤에야 손이 움직인다. 그녀의 실은 단순한 바느질이 아닌, 감정의 선을 따라가며 움직이는 도구다.
손끝으로 새기는 기억, 바느질로 남기는 마음
이나경 작가의 작업실에는 각양각색의 천과 실, 단추와 자수 도안이 정갈하게 놓여 있다. 대부분 헌 옷이나 빈티지 천에서 잘라낸 조각들이다. 그녀는 새 원단보다 이미 시간이 깃든 천을 선호한다. “사람의 손길이 스며든 천은 질감부터 달라요. 그게 책을 넘기는 손끝에 닿으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되죠.” 천의 두께, 촉감, 마모된 정도까지 고려해 책갈피의 앞면과 뒷면을 조합하는 것부터가 그녀의 디자인 철학이다.
그녀가 만든 책갈피 중 가장 잊지 못하는 건,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전에 자주 쓰던 손수건으로 만든 작품이다. 의뢰인은 “엄마가 가장 좋아하던 소설에 꽂아두고 싶다”며 눈물 섞인 메시지를 보냈고, 이나경 작가는 손수건의 자수 모서리를 그대로 살려 얇은 리넨 위에 붙이고, 모서리에 작은 단추를 달았다. “그분은 책을 펼칠 때마다 엄마 손을 만지는 기분이라고 했어요. 그 말에 저도 울었어요.”
책갈피 하나에는 이름 모를 사연이 스며 있다. 고백을 앞둔 대학생, 졸업을 앞둔 고등학생, 이별 후에 위로가 필요한 사람까지. 책이라는 매개 안에 자신의 마음을 담고 싶은 이들이 그녀에게 책갈피를 의뢰한다. “요즘은 다들 빨리 넘기잖아요. 책도, 마음도. 저는 누군가의 마음 한 페이지를 천천히 넘길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그녀의 작업은 그래서 시간과 마음을 조율하는 일이다.
기계로 찍어낸 정교함보다 중요한 건 ‘다름’과 ‘느낌’
디지털 자수기와 자동 바느질 기계는 이미 패션 산업 전반에서 사람 손을 대체하고 있다. 원하는 디자인을 입력하면 컴퓨터가 즉시 자수를 넣고, 규격화된 책갈피도 단시간 내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나경 작가는 그 흐름에서 한발 비껴서 있다. “기계는 정확하고 빠르지만, 감정을 새길 순 없어요. 실이 엇나가고, 바느질이 흔들릴 때 오히려 사람 냄새가 나요.”
그녀는 바느질을 ‘실로 그리는 드로잉’이라 부른다. 같은 꽃도 어떤 날은 무겁고, 어떤 날은 경쾌하게 표현된다. 감정이 실의 장력과 속도, 바늘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기계가 아닌 손으로 할 때, 똑같은 책갈피는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다. “누군가에겐 이 흔들리는 꽃잎이 더 따뜻할 수 있잖아요. 그게 수작업의 힘이에요.”
책갈피를 만드는 시간은 곧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라고도 말한다. 바느질은 조용히 집중해야 하는 작업이고, 그 조용함 속에서 작가는 누군가의 사연을 되새기며 작업에 몰입한다. “실을 꿰고, 바늘을 움직이는 동안 마음이 정리돼요. 그래서 제가 만든 책갈피가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면, 저도 위로를 받은 기분이에요.” 그녀의 작품은 작고 조용하지만, 감정을 품고 있기에 더 큰 울림을 준다.
AI 시대에도 ‘느린 손’이 남기는 감동
요즘은 AI 기반 북마크 디자인 플랫폼도 등장하고 있다. 책 제목과 감정 키워드를 입력하면 관련된 이미지와 문구를 자동 생성해 주는 기술이 보편화되고 있다. 한쪽에선 맞춤형 북마크를 클릭 몇 번으로 출력할 수 있는 온라인 서비스도 운영된다. 하지만 이나경 작가는 그런 시대 속에서도 손으로 만드는 감성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는다. “디자인은 흉내 낼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디자인이 탄생한 이유까지는 흉내 못 내요.”
그녀는 손바느질 책갈피의 가치가 단순한 ‘소품’이 아닌 ‘기억을 저장하는 장치’라고 말한다. “책갈피는 책에서만 쓰는 게 아니에요. 책에서 꺼내어 추억을 떠올리고, 선물하며 마음을 나누는 도구죠.” 요즘은 독서 모임, 출판기념회, 결혼식 답례품으로도 그녀의 책갈피가 자주 쓰인다. 모두가 똑같은 것을 나누는 대신, ‘다름’을 공유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작업을 이어가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에게는 그냥 천 조각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조각이 가장 소중한 기억일 수 있거든요.” 그래서 그녀는 오늘도 천을 고르고, 실을 꿰고, 바늘을 든다. 바느질 책갈피는 작지만, 사람의 마음을 오래 잡아두는 힘이 있다.
AI가 아무리 빠르고 정교해져도, 손으로 만든 ‘느림의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감정은 여전히, 누군가의 책장 속에서 조용히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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