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화 시대에 연필을 깎는 장인의 고집
요즘 시대에 연필을 쓰는 사람은 점점 줄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스마트폰 메모장이나 태블릿 펜을 사용하고, 학생들마저 샤프와 태블릿을 병용하는 경우가 많다. 필기구 산업에서도 자동화 공정과 대량 생산이 주를 이루며, 연필 한 자루는 수 초 만에 공장에서 뽑혀 나온다. 그러나 충청북도 제천의 한 목공 작업실에서는, 오늘도 오직 사람의 손만으로 연필을 만드는 장인이 있다. 59세 김경수 씨는 지난 20년 동안 손으로만 수제 연필을 만들어온 유일한 1인 제작자다.
그의 연필은 기계로 만들어진 연필과는 출발부터 다르다. 나무 선택부터 시작해, 연필심을 넣는 홈을 파고, 심을 넣고, 다시 접착제로 고정한 뒤 모양을 다듬고, 표면을 손으로 사포질하며 완성해 낸다. “나무가 너무 마르면 가공 도중 부서지고, 너무 젖으면 심을 넣을 수 없어요. 상태를 보고 그날 작업을 조절하죠.” 그가 사용하는 나무는 대부분 국내산 느티나무, 오동나무, 때로는 폐가구에서 나온 목재다. 기계는 정형화된 원목을 다루지만, 그는 나무마다 다른 결과 촉감을 이해하고 반응한다.
김경수 씨는 매일 아침 연필심을 확인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흑연과 점토의 혼합 비율을 체크하고, 기후와 온도에 따라 심의 딱딱함을 조절하기도 한다. “겨울엔 손이 차가워서 심이 쉽게 부러지고, 여름엔 점토가 물러지기 쉬워요. 그래서 계절에 따라 레시피가 달라져요.” 공장에서는 이런 변수를 고려하지 않고 정해진 배합으로 수천 개를 찍어내지만, 김 씨는 하루에 연필을 많아야 20자루밖에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 20자루에는 오로지 한 사람의 시간과 집중, 감각이 담겨 있다.
수제 연필이 가지는 감각과 시간의 무게
김경수 씨가 만드는 수제 연필은 겉모습만 봐도 다르다. 같은 길이, 같은 색이 아니며, 나무의 결이 그대로 살아 있다. 어떤 연필은 손에 잡으면 둥글고 따뜻한 감촉이 나고, 어떤 것은 약간 울퉁불퉁해서 손에 잘 밀착된다. “기계는 똑같이 만들지만, 손은 그 사람 손에 맞게 만들어요.” 실제로 그는 주문자의 손 크기, 연필을 쥐는 습관, 사용 목적에 따라 재질과 굵기를 달리 조정한다. 필기용 연필은 가볍고 부드럽게, 드로잉용 연필은 약간 무겁고 단단하게 만든다.
이런 차이는 단순히 디자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연필심을 심을 때 사용하는 압력, 나무 표면을 다듬을 때의 방향, 사포의 입자 굵기까지 세심하게 고려한다. “사포질은 제일 중요해요. 이게 손에 닿는 감촉을 결정하거든요. 거칠게 하면 손이 피곤하고, 너무 매끄러우면 미끄러워요.” 그래서 그는 손바닥으로 감촉을 느끼며 연필 하나하나를 다듬는다. 이 과정은 기계로는 절대 구현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는 말한다. “수제 연필은 한 자루 시간이 녹아 있어요. 그래서 쉽게 쓰고 버리지 않게 돼요.” 실제로 그의 고객 중 상당수는 연필을 쓰다가 다 쓰면 새로 깎지 않고 보관용으로 남겨두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자녀의 이름을 새겨 졸업 선물로 주문하고, 누군가는 첫 출근을 기념하기 위해 자신만의 연필을 만든다. 그저 글씨를 쓰는 도구가 아니라, 삶의 한순간을 기록하는 물건이 되는 것이다. AI는 기능을 완벽히 재현할 수는 있어도, 기억을 불러오는 감각까지는 담아낼 수 없다. 수제 연필은 그 지점에서 차별성을 갖는다.
단순한 도구를 넘은 하나의 작품, 고객과 이어지는 감정의 연결
김경수 씨의 연필을 찾는 고객은 대부분 연필을 오랫동안 써온 사람들이다.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디자이너, 학생, 교사, 심지어 연세 많은 어르신까지 다양한 이들이 그의 공방을 찾는다. 어떤 이들은 손의 떨림 때문에 기성 제품이 맞지 않아 그의 연필을 찾고, 어떤 이들은 유년 시절 아버지의 연필을 기억하며 수제 연필을 주문한다. 그는 그들에게 연필을 단순히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이야기를 함께 듣는다. “연필 하나를 만들기 위해 먼저 그 사람이 어떤 글을 쓰는지, 어떤 종이에 쓰는지부터 알아야 해요.”
한 작가는 ‘종이에 닿는 소리가 조용한 연필’을 원했고, 그는 연필심의 흑연 비율을 낮추고, 나무의 단단함을 살려 그 감각을 완성했다. 또 어떤 학생은 “시험 볼 때 손에 땀이 많이 나요”라고 말했고, 그는 나무 표면에 미세한 홈을 넣어 미끄럼을 방지했다. 이런 세심함은 대량 생산 시스템에서는 구현될 수 없다. AI는 사람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제품을 추천할 수는 있어도, 사람의 불편함을 감각으로 이해하고 수정하는 일은 아직 할 수 없다.
김경수 씨는 연필을 만들 때 항상 이름이나 짧은 문구를 새긴다. 그것은 고객이 원할 때만 제공되며, 작은 글씨지만 그 사람만의 상징이 된다. “이름이 새겨져 있으면, 절대 함부로 못 버려요. 그게 연필의 무게를 다르게 만들죠.” 그는 이 작은 디테일이 연필에 대한 애정을 만들고, 애정은 다시 습관을 바꾼다고 믿는다. 실제로 그의 고객 중에는 연필을 너무 아껴 쓰느라 한 자루를 2년 넘게 사용하는 이도 있다. “그건 더 이상 도구가 아니라, 사람의 일상이 된 거예요.”
AI 시대에도 손이 만든 도구가 필요한 이유
수제 연필은 결코 효율적인 제품이 아니다. 가격은 기성 연필보다 수배 이상 비싸고, 생산 속도는 느리며, 외관은 기계처럼 매끈하지 않다. 그러나 김경수 씨는 그것이 오히려 수제 연필의 존재 이유라고 말한다. “요즘은 너무 똑같은 게 많아요. 그래서 다들 비슷하게 살아가죠. 근데 손으로 만든 건 다 달라요. 그래서 그걸 쓴 사람도 다르게 기억돼요.” 그는 이 시대야말로 오히려 수제 연필이 필요한 시대라고 믿는다.
디지털 도구는 빠르고 편리하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 많은 것을 쉽게 지워버린다. 손으로 쓴 글씨, 연필의 마찰, 종이 위를 스쳐 지나가는 소리, 그 모든 감각은 사람의 기억을 자극한다. 김경수 씨는 연필을 통해 ‘기억의 도구’를 만든다. “손으로 쓰면 마음이 느려지고, 느려지면 생각이 깊어져요. 그게 연필이 주는 힘이에요.” AI는 이런 감정을 시뮬레이션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그는 앞으로도 오직 손으로 연필을 만들 계획이다. 가죽 펜슬 케이스, 맞춤 연필깎이 등 부가 제품들도 개발하고 있지만, 중심은 언제나 연필이다. 브랜드를 키울 생각도 없고, 제자 한 명만 두고 기술을 전수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건 빨리 배우는 기술이 아니에요. 오랫동안 손을 써야 손이 배워요.” 김경수 씨에게 연필은 단순한 공예품이 아닌, 손이 전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이고 오래가는 메시지다.
AI가 주도하는 시대에도, 한 자루의 연필이 전할 수 있는 감정과 기억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시대일수록, 사람의 손이 만든 도구는 더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그래서 김경수 씨는 오늘도 작은 나무 조각을 깎고, 흑연을 다듬으며, 누군가의 손에 꼭 맞는 연필 한 자루를 조용히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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