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지갑을 디자인하는 시대, 손으로 가죽을 자르는 한 사람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패션 산업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AI는 가죽 제품의 디자인을 빠르게 시각화하고, 공장은 그 설계를 바탕으로 수천 개의 제품을 하루 만에 찍어낸다. 정교하게 압착된 수, 절대 흐트러짐 없는 재단, 완벽한 균형을 자랑하는 마감은 인간의 손보다 빠르고 정확하다. 그러나 서울 성수동의 한 소형 공방, 3평 남짓한 공간에서 여전히 손으로 가죽을 자르고 바느질하며 지갑을 만드는 한 남자가 있다. 36세 김선호 씨는 1인 수제 가죽 브랜드를 운영 중이다.
그는 디자인부터 재단, 봉제, 포장, 출고까지 전 과정을 직접 한다. 하루에 지갑을 두세 개밖에 만들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는 말한다. “제 제품은 절대 똑같지 않아요. 가죽의 결도 다르고, 바느질의 힘도 매번 달라요. 그래서 오히려 손님은 더 특별함을 느껴요.” 그는 자연 가죽의 질감을 그대로 살리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가죽의 결을 살펴 어떤 부분을 앞면으로 쓸지 결정하고, 찢어질 수 있는 부분은 사용하지 않는다. 기계는 전체를 재단하지만, 그는 버릴 부분이 많아도 손으로 하나씩 판단한다.
AI가 만들어내는 정교한 균일함과는 반대로, 김선호 씨는 불균형 속에서 균형을 만든다. 같은 디자인이라도 고객에 따라 약간의 크기 조정을 하기도 하고, 가죽 색상을 미세하게 다르게 섞기도 한다. “AI는 정확하죠. 하지만 정확하다고 해서 마음에 남는 건 아니에요. 손으로 만든 건 만지는 순간 알 수 있어요.” 그가 만든 가죽 지갑은 겉으로 보기엔 단순해 보일 수 있지만, 사람의 손을 거친 흔적이 담겨 있어 오래 사용할수록 가죽이 사용자에게 맞게 길든다. 이 ‘시간의 감각’은 기계로는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손이 만든 가죽, 기계가 흉내 낼 수 없는 감정의 결과물
수제 가죽 공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느낌’이다. 김선호 씨는 어떤 도면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직접 스케치하고, 눈으로 치수를 재고, 손으로 재단한다. 고객의 요청에 따라 형태와 느낌을 다르게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떤 고객은 "부드럽지만 두껍지 않은 지갑"을 요청했고, 그는 얇은 소가죽의 이면을 조심스럽게 갈아내면서도 견고함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기계는 정해진 두께로만 자르지만, 나는 손으로 그 두께를 조절할 수 있어요. 그 차이가 쓰는 사람 손에 그대로 느껴져요.”
그는 모든 가죽 제품을 안감 없이 만든다. 가죽의 결을 온전히 느끼게 하기 위함이다. 실 또한 인조가 아닌 천연 실을 사용하며, 바느질은 전통 새들 수(saddle stitch) 방식을 고수한다. 이 방식은 기계보다 시간이 두 배 이상 걸리지만, 더 견고하고 오래간다. “기계 바느질은 빠르지만, 실이 한 줄만 끊어져도 전체가 망가져요. 근데 손바느질은 실 하나가 끊겨도 전체에 영향이 없죠. 그게 기술이고, 정성이예요.”
특히 그는 ‘반복’이 아닌 ‘기억’을 중시한다. 기계는 데이터를 반복하지만, 그는 손님의 얼굴, 손 크기, 사용 용도 등을 기억하고 제품에 반영한다. 한 번은 한 손님이 어릴 적 아버지가 쓰던 지갑과 비슷한 제품을 요청했다. 김선호 씨는 손님의 설명만으로 도면 없이 제품을 만들었고, 손님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보였다. “그때 알았어요. 내 손으로 만든 물건이 단순한 지갑이 아니라 기억이 될 수 있다는걸요.” AI는 기억을 읽지만, 감정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 차이가 수공예의 진짜 본질이다.
속도보다 방향, 효율보다 진심이 중요한 이유
수공 가죽 공예는 시간이 많이 든다. 하나의 제품을 만드는데 최소 6시간, 복잡한 디자인은 이틀이 걸리기도 한다. 김선호 씨는 이 ‘느린 속도’를 오히려 자랑한다. “빨리 만들 수 있는 건 많아요. 하지만 오래 쓰는 건 많지 않죠. 나는 빨리 팔기보다 오래 남는 걸 만들고 싶어요.” 그는 하루 작업 시간의 절반을 가죽 손질에 쓴다. 먼지를 닦고, 크림을 바르고, 손으로 문지른다. 이 과정을 통해 가죽은 부드럽고 촉촉해지며, 제품이 되기 전부터 이미 ‘누군가의 물건’이 된다.
브랜드를 처음 시작했을 때 그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지인을 상대로만 제품을 팔았다. 대량 생산 없이도 브랜드를 유지할 수 있느냐는 의문을 받았지만, 고객들의 재구매율이 매우 높았다. “하나 사면 끝나는 게 아니더라고요. 지갑을 쓰다가 카드 지갑이 필요해지고, 카드 지갑 쓰다가 가방이 필요해지고. 그러면서 다시 찾아오세요.” 그는 이를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AI는 트렌드를 분석하고, 어떤 디자인이 잘 팔리는지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김선호 씨는 고객 한 명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어떤 분은 ‘나는 왼손잡이라서 카드 위치가 다르게 돼야 해요’라고 했어요. 그런 건 AI가 몰라요. 사람한테 들어야 알 수 있어요.” 그래서 그의 제품은 ‘쓰는 사람의 방식’을 고려한 설계로 차별화된다. 속도는 느리지만, 진심은 분명히 전달된다. 그것이 수공 브랜드의 생존 방식이다.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남을 수밖에 없는 손의 기술
김선호 씨는 자신의 브랜드가 ‘트렌디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트렌드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매 시즌 새로운 제품을 내놓지 않고, 똑같은 지갑이라도 5년째 만드는 제품이 있다. 그는 말한다. “기계는 계속 새로운 걸 뽑아내지만, 손은 한 가지를 깊게 만들 수 있어요. 그래서 나는 변하지 않는 디자인을 만들고, 그걸 계속 발전시켜요.” 이 철학은 브랜드를 찾는 고객들에게 오히려 큰 신뢰로 다가간다.
그는 가죽 공방을 운영하면서도 ‘기술보다 감정’이라는 원칙을 지킨다. “손은 기술을 익히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이기도 해요.” 가죽은 손의 온도에 따라 반응하고, 손가락의 압력에 따라 주름의 형태가 달라진다. AI는 도면대로 재단하지만, 사람의 손은 매번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그 변화가 오히려 제품을 더 유일하게 만든다.
최근 몇몇 대형 브랜드에서 그의 제품을 OEM으로 제작하자는 제안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대신 만들어주면 좋겠지만, 그건 내가 만든 게 아니에요. 내 손이 들어가야 내 제품이 되는 거예요.” 그는 앞으로도 1인 브랜드로 남을 계획이다. 속도는 느리지만, 사람의 마음에 오래 남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수공예는 단지 살아남는 산업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사람에게 필요하고, 기계가 흉내 낼 수 없는 감각과 감정이 담긴 기술이다. 김선호 씨의 손은 오늘도 한 땀씩 실을 꿰고, 가죽을 다듬으며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물건을 만든다. 그래서 이 시대에도, 앞으로도 그의 손은 계속 살아 있을 것이다.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 카테고리의 다른 글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전통 장지 만드는 지승공예 장인 (0) | 2025.07.03 |
---|---|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대나무 바구니 장인의 손끝 이야기 (1) | 2025.07.03 |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수공 도자기 장인 인터뷰 (1) | 2025.07.02 |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수제 양초 공방의 정성과 기술 (0) | 2025.07.02 |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조선간판 붓글씨 장인 인터뷰 (1) | 2025.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