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의 정밀함을 넘는 소리, 손으로 빚는 울림
모든 것이 자동화되는 시대다. 인공지능이 설계도를 완성하고, 기계가 재료를 절단하며, 3D 프린터가 물건을 뽑아내는 시대에 ‘망치’와 ‘불’로만 일하는 장인이 있다. 충남 공주의 한 야산 아래, 허름한 작업장에서 오늘도 망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올해 71세인 최성두 장인은 40년 넘게 동종(銅鐘)을 만들어온 사람이다.
동종은 단순한 종이 아니다. 소리의 울림, 균형, 벽의 두께, 내부의 곡선 등 모든 것이 정확해야 한다. 종소리 하나가 사찰의 경건함을 좌우하고,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울려 퍼질 울림을 결정짓는다. 그래서 그는 단 하나의 종을 만들기 위해 몇 달을 망치질한다. “종은 찍어내는 게 아니에요. 불과 망치, 그리고 사람의 귀로 만들어야 해요.” 그는 주조 공정에서 기계가 아닌 전통 방식인 ‘손망치 두드리기’를 고수한다.
최 장인의 작업은 먼저 구리와 주석의 비율을 정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이 비율은 온도와 기압, 제작 목적에 따라 달라진다. 일반적으로는 78:22를 기준으로 삼지만, 그는 자기 귀와 손으로 녹인 쇳물의 질감을 본다. “쇳물이 너무 맑으면 깨지고, 탁하면 소리가 안 나요. 딱 적당한 상태는 눈보다 귀와 손이 먼저 알아요.” 이렇게 완성된 금속을 주형에 붓고 식힌 후, 수백 번의 망치질로 형태를 잡아 나간다. 기계로 찍어내는 종은 형태는 완벽하지만 울림이 없다. 그는 “기계는 두드리는 데 목적이 있고, 나는 울리게 하는 데 목적이 있어요”라고 말한다.
동종 하나에 담긴 손의 흔적과 시간의 무게
동종 제작은 고된 노동이다. 한 번에 만들 수 있는 건 많아야 두세 개. 제작 과정은 주조, 식힘, 다듬기, 두드리기, 문양 새기기, 음향 조정까지 최소 30단계를 넘는다. 최성두 장인은 작업 과정 대부분을 혼자 한다. “이건 함께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에요. 손이 다 기억하고 손이 다 책임져야 해요.”
특히 종을 망치로 두드리는 과정은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음의 조율’이다. 동종은 겉보기엔 둥그렇고 단순해 보이지만, 벽 두께가 조금만 달라져도 소리가 달라진다. 그는 작업할 때마다 종을 가볍게 쳐보며 울림을 확인한다. 너무 맑으면 금방 깨지고, 너무 탁하면 멀리 울리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처럼 균형이 중요해요. 감정도 너무 무거우면 침묵하고, 너무 가벼우면 날아가죠. 종도 마찬가지예요.”
망치의 무게, 각도, 타격 속도까지 손으로 조절하는 그는 수천 번 두드리는 과정에서 금속과 대화하듯 집중한다. 이 작업은 하루에 몇 시간 이상 못 한다. 손목과 어깨가 먼저 아프고, 이어서 청각이 민감해진다. 그는 매 작업 전후 귀를 쉬게 한다. “귀가 피곤하면 정확한 소리를 못 들어요. 그러면 종을 망치로 부수는 거죠.” 그래서 그의 종은 한 자루 한 자루가 ‘들어보고 만든’ 결과물이다. 기계로는 절대 구현할 수 없는 ‘소리의 공예’다.
소리를 조율하는 장인의 감각, AI가 대체할 수 없는 기술
기계는 정확하다. 하지만 정확하다고 해서 완벽한 것은 아니다. 최성두 장인은 이 점에서 기계와 사람의 차이를 명확하게 이야기한다. “기계는 설계대로 만들죠. 근데 사람 귀는 각자 달라요. 내가 만드는 종은 사람 귀로 들었을 때 편해야 해요.” 그는 완성된 동종을 여러 위치에서 쳐보고, 공간에 어떻게 울리는지를 듣는다. 실내에서의 울림과 야외에서의 울림이 다르고, 새벽과 저녁에 들리는 소리도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미세한 차이는 기계가 측정하기 어렵다. AI는 주파수와 데시벨을 분석할 수 있지만, 사람의 감성에 닿는 울림을 정의하진 못한다. “종소리는 사람 마음에 닿는 진동이어야 해요. 기계는 공기만 흔들고, 나는 마음을 울리게 만들어요.” 그래서 그는 절대 작업 중에 기계적 측정을 하지 않는다. 오직 귀와 손, 그리고 가슴으로 판단한다.
또한 그는 종마다 다르게 문양을 새긴다.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소리를 방해하지 않도록 하는 공진 조절의 일환이다. “문양 하나가 소리를 흡수하거나 튕겨낼 수 있어요. 그래서 새길 때도 울림을 생각하면서 해요.” 손으로 조각칼을 들고, 종 표면에 구름, 연꽃, 불경 문을 새기는 과정은 한 자루당 며칠이 걸리기도 한다. 그 섬세한 작업은 기계가 복제할 수 있어도, 그 의도까지 재현할 수는 없다.
이처럼 동종은 금속으로 만든 물건이지만, 결국 인간의 감각과 시간을 통해 생명을 부여받는다. 그것이 바로 AI가 흉내 낼 수 없는 지점이며, 수공 장인이 여전히 이 시대에 살아남는 이유다.
살아 있는 소리를 만드는 손, 사라지지 않을 기술
최성두 장인의 동종은 국내 사찰은 물론, 일본, 미국, 프랑스의 사찰이나 명상센터로도 전해졌다. 한 일본 스님의 요청으로 만든 종은 특별히 저음이 강하게 울리도록 조정했는데, 그 스님은 “내 마음이 진정되는 소리”라며 감사의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말한다. “이 종은 한국에서 만들었지만, 사람 마음에 닿는 울림은 국경이 없어요.”
그의 공방을 찾는 이들 중에는 젊은 디자이너, 음향 기술자, 전통 공예 연구자들도 있다. 그러나 제자로 남는 사람은 아직 없다. “이건 손보다 귀가 더 중요한 기술이에요. 귀가 안 열리면 아무리 배워도 종을 만들 수 없어요.” 그는 기술을 가르칠 순 있어도, 감각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하루아침에 익힐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조급한 사람에게 이 일을 권하지 않는다.
이 시대에 동종은 사찰에서만 쓰이는 물건이 아니다. 힐링 콘텐츠, 요가, 명상, 심리치료 분야에서도 그 울림을 찾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오히려 동종의 쓰임새가 더 많아졌다고 본다. “조용한 소리, 느린 소리, 오래가는 소리를 사람들이 다시 찾고 있어요. 그건 기계가 주지 못하는 소리예요.”
동종을 만든다는 것은 금속을 다루는 기술이자, 소리를 조율하는 감각이며, 사람의 마음에 닿는 울림을 만드는 예술이다. AI가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그 한 자루의 종에서 나오는 생생한 떨림은 손으로만 완성된다. 그래서 최성두 장인의 망치는 오늘도 멈추지 않는다. 불 앞에서 땀을 흘리며, 마음으로 소리를 듣고, 금속에 생명을 불어넣는 그의 손끝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귀중한 기술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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