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자동화 시대에 손으로 불을 만드는 사람들
디지털 기술이 사람의 손을 대신하는 세상, 양초조차도 공장에서 쏟아져 나온다. 대형 유통 업체에 납품되는 양초는 정밀한 자동화 시스템으로 단시간에 수천 개씩 생산된다. 색, 크기, 향기까지 입력값 하나면 무한히 복제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시대에도 여전히 ‘불을 손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서울 마포구의 골목길 한 편, 작은 수제 양초 공방을 운영하는 박소연 씨는 그중 한 명이다.
그녀는 하루 평균 10~15개의 양초만 만든다. 같은 모양이지만 똑같은 건 없다. “양초는 결국 사람의 감정을 태우는 물건이에요. 기계처럼 똑같이 찍어내면 그 감정이 사라지죠.” 그녀가 말하는 수제 양초는 단순한 향과 디자인이 아닌, ‘손으로 만든 불빛’ 그 자체다. 공방에는 다양한 금형, 천연왁스, 심지, 허브, 천연 오일이 정갈히 놓여 있다. 모두 손으로 고르고, 배합하고, 온도를 맞추고, 굳히는 과정을 반복한다. 공장 양초는 1시간이면 1,000개가 나오지만, 그녀의 양초 하나에는 3시간 이상이 걸린다. 그것도 숙련된 손이 있을 때 이야기다.
AI가 촛불의 모양을 디자인하고, 공장이 그걸 생산한다고 해도 박소연 씨는 굳이 손으로 만든다. “사람의 감정은 다 다르잖아요. 누군가는 이 양초를 위로받기 위해 사고, 누군가는 기념일을 위해 사요. 그런데 똑같이 만들어진 건 그 마음을 담기 어려워요.” 그녀는 손님마다 이유를 묻고, 그 이유에 맞춰 향과 색을 바꾼다. 기계로는 구현할 수 없는 인간적인 조율이 존재한다. 양초 하나에도 ‘맥락’과 ‘의미’를 담는 것이 수공예의 핵심이며, 박소연 씨가 AI 시대에도 꿋꿋하게 살아남는 이유다.
온도, 습도, 감정까지 고려한 정밀한 기술
수제 양초를 만드는 일은 단순히 왁스를 녹이고 부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날의 온도와 습도, 사용하는 왁스의 종류, 색소의 농도, 향유의 비율, 굳히는 시간과 온도까지 모두 고려해야 한다. 박소연 씨는 수십 번의 실패 끝에 지금의 기준을 갖게 되었다. “겨울에는 왁스가 너무 빨리 굳어요. 그러면 표면이 갈라지거나, 향이 제대로 안 퍼지죠. 여름엔 또 너무 천천히 굳어서 모양이 퍼지고 색이 흐릿해지고요.”
그녀는 날씨를 보고 그날 사용할 왁스의 비율과 온도를 조절한다. 비 오는 날이면 향유의 농도를 높이고, 기온이 낮을 땐 굳히는 틀을 따뜻하게 데워둔다. 이 모든 작업은 오로지 손의 감각과 경험에 의존한다. “기계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지만, 저는 손의 느낌으로 판단해요. 왁스를 저을 때 점도가 평소보다 무거우면 수분이 많다는 거예요. 그러면 향이 잘 안 섞이니까 순서를 바꾸거나 시간을 늘려야 하죠.”
특히 그녀는 ‘불균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모든 게 균일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이다. 손으로 만든 양초는 때로 기포가 생기기도 하고, 색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위안을 준다. “요즘 사람들 너무 완벽한 걸 자주 봐서 그런지, 이런 자연스러운 흔들림이 더 좋아진대요. 양초는 결국 불이에요. 흔들리는 감정을 담아야 하죠.”
AI는 정확하고 빠르다. 하지만 박소연 씨의 손은 부정확한 대신 따뜻하고, 예측 불가능한 대신 감각적이다. 바로 그 차이가 사람들을 이끌고, 이 공방을 다시 찾게 만드는 힘이다.
불빛에 담긴 이야기, 고객과의 교감이 기술을 만든다
박소연 씨의 공방은 단순한 제조 공간이 아니다. 양초를 만들기 위해 찾은 손님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공감의 공간’이다. 그녀는 주문받기 전에 꼭 묻는다. “이 양초는 누구에게 주시나요?” 혹은 “무슨 마음으로 이걸 만들고 싶으신가요?” 처음엔 당황하는 손님도 많지만, 이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 아픈 가족을 위해, 이별한 연인을 위해, 오랜 친구의 생일을 위해 등 그 사연은 모두 다르다.
그녀는 그 사연을 바탕으로 색을 정하고, 향을 고르고, 문구를 적는다. 기계라면 다섯 가지 대표 향 중 하나를 골라야 하지만, 박소연 씨는 15가지 향을 조합하고, 그날 기온에 따라 농도를 조절한다. “한 손님이 ‘엄마 냄새가 나는 양초’를 만들어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어릴 때 목욕탕에서 썼던 라벤더와 미역 냄새가 나는 오일을 찾아 조합했죠.” 그녀는 사람들의 기억과 감정을 향으로 구현하는 일을 한다.
또 어떤 손님은 이혼 후 처음 맞는 생일이라며 자신을 위한 양초를 주문했다. 박소연 씨는 은은한 자몽과 백단향을 섞고, 초에 직접 ‘당신은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라는 글귀를 새겼다. 기계가 만들었다면 절대 담기지 않았을 감정이지만, 손의 온도와 마음이 만든 결과는 명확했다. 그 손님은 양초를 받자마자 눈물을 흘렸고, 몇 달 뒤 다시 공방을 찾아 “다시 시작할 힘이 생겼다”고 전했다.
이처럼 수제 양초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공장에서 찍어낸 완제품이 아닌, 누군가의 기억과 온도를 품은 작은 불빛이다. 그리고 그 불빛은 박소연 씨처럼 사람의 마음을 듣고, 그것을 손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다. AI는 데이터를 듣지만, 감정을 듣지 못한다. 박소연 씨는 그 차이를 믿고, 오늘도 불을 만든다.
기계보다 느리지만 오래가는 기술의 의미
수제 양초는 절대 빠르게 만들 수 없다. 박소연 씨는 하루에 많아야 10개 정도의 양초를 만든다. 금형에 부은 뒤 최소 12시간 이상 굳히고, 그 뒤 표면을 다듬고, 불량을 선별하고, 심지를 자르고, 포장을 직접 한다. 어떤 양초는 색이 어울리지 않아 다시 만들기도 하고, 굳는 도중 공기층이 생겨 폐기하기도 한다. 효율이라는 기준에서는 비합리적이지만, 그녀는 말한다. “이건 시간을 들여야 의미가 생겨요. 너무 빨리 만들면 불빛도 금방 꺼지는 것 같아요.”
최근엔 대형 브랜드에서도 수제 양초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고급 향, 감각적인 디자인, 프리미엄 패키지로 무장한 제품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박소연 씨는 개의치 않는다. “그건 감각이 멋진 거고, 내가 하는 건 감정이 담긴 거예요. 둘은 아예 다르죠.” 그녀의 고객들은 양초를 사러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을 위한 불빛을 주문하러 온다. 그리고 그 불빛은 절대 대체될 수 없는 하나의 ‘작품’으로 남는다.
수공업은 종종 불편하고, 느리고, 비효율적이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정성과 기술은 AI가 만들어낸 효율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가치다. 수제 양초는 기술이라기보다 ‘관계’이고, 불빛이라는 결과보다는 ‘사람의 온도’에 더 가까운 결과물이다. 박소연 씨는 지금도 손으로 불을 만든다. 온도를 재고, 향을 섞고, 흔들리는 심지를 다듬으며 오늘 하루를 불빛으로 마무리한다.
“기계는 빛을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따뜻함은 사람 손에서만 나와요.” 그녀가 만든 양초는 그렇게 AI가 흉내 낼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람을 위로하고, 공간을 감싸며, 세상의 속도를 잠시 멈추게 만든다. 느리게 만든 불빛은 오래 기억된다. 그래서 수제 양초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 시대에 더 필요해지는, 살아 있는 기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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