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디지털 세상 속 붓을 고집하는 한 사람의 고요한 저항
디지털로 모든 것이 처리되는 시대, 간판조차 손으로 쓴다는 건 낭만으로만 치부되기 쉽다. 하지만 서울 종로3가 낡은 골목, 간판이 다 닳아 잘 보이지 않는 2층 작업실에는 지금도 붓으로 간판을 쓰는 장인이 있다. 올해로 일흔둘, 최병도 씨는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오직 손 글씨 간판만을 고집해 온 사람이다. 그는 나무판과 붓, 먹, 그리고 손의 감각만으로 세상의 글자를 써왔다.
그가 처음 간판 일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모든 간판은 붓으로 썼다. 글씨가 아름다우면 가게에 손님이 몰렸고, 글씨체만으로도 지역 장인의 실력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단순한 글씨가 아니라 사람의 운명, 상점의 기운, 주인의 의지를 읽고 붓끝에 담았다. “나는 간판을 쓰기 전에 먼저 그 가게 주인 얼굴부터 봐요. 어떤 느낌을 주는지, 얼마나 정성 들이는지. 간판도 사람이 만드는 거니까 사람 기운이 들어가야 해요.”
요즘은 컴퓨터 폰트로 몇 분 만에 간판 시안을 만들고, LED나 플라스틱으로 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최 장인은 여전히 붓을 들고 먹을 갈아 나무판에 글자를 올린다. “기계는 빠르고 정확하지만, 감정이 없어요. 붓글씨는 사람의 마음을 담는 글씨예요. 보는 사람도 그걸 느끼죠.” 실제로 그의 작업실을 찾는 손님들은 대기업이 아닌 동네 장사꾼, 전통을 중시하는 음식점, 그리고 추억을 복원하고 싶은 이들이 대부분이다.
한 글자에 담긴 의미, 붓이 전하는 이야기는 다르다
간판은 단순히 가게 이름을 알리는 표식이 아니다. 특히나 손 글씨로 쓴 간판에는 간판을 의뢰한 사람의 이야기, 가게가 가진 철학, 그리고 공간이 품은 정서가 함께 녹아든다. 최병도 장인은 붓을 들기 전에 손님과 꼭 대화를 나눈다. “가게 이름이 왜 그런지, 어떤 마음으로 장사를 시작했는지 듣다 보면 글씨체가 떠올라요. 무조건 굵게, 무조건 화려하게 쓴다고 좋은 글씨가 아니에요.”
그는 글씨를 단순한 시각적 결과물로 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전통 국밥집의 간판을 쓸 땐 글씨에 고요한 둥글림과 깊은 힘을 담으려 한다. 찻집의 간판이라면 곡선과 여백을 살려 차분함을 강조한다. "국밥집은 따뜻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곡선을 좀 더 두껍게 하고, 중간중간 숨 쉴 틈을 줘요. 보는 사람도 글씨를 보면서 ‘이 집 따뜻하겠다’ 느끼는 거예요."
그의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 중 하나는 60년 가까이 된 노포의 간판을 새로 쓰는 일이었다. 철거된 간판의 나무 조각을 들고 온 손주는 눈물로 부탁했다고 한다. “할아버지 가게 이름만은 다시 그대로 써주세요. 기계 말고 손 글씨로요.” 최 장인은 먹을 갈아가며 오래된 글씨체를 복원했고, 새 나무판에 조심스럽게 올렸다. 간판을 건 순간, 그 집은 다시 살아났고, 동네 주민들의 발걸음도 다시 이어졌다. 그는 말한다. “내가 하는 일은 단순한 간판 제작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을 붙잡는 일이에요. 기계로 만든 글씨는 그걸 못 해요.”
붓끝에서 느껴지는 감각, AI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다
붓글씨는 기술보다 감각이 중요하다. 최 장인은 붓의 힘 조절, 먹의 농도, 나무판의 표면 상태, 날씨와 습도까지 고려해 작업한다. 여름에는 먹이 너무 빨리 마르기 때문에 빠르게 써야 하고, 겨울에는 먹이 번지지 않도록 천천히 눌러야 한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붓끝이 떨려 글씨가 고르지 않기 때문에 작업을 미루기도 한다. “이건 손의 감각이에요. 눈으로는 안 보이고, 설명도 못 해요. 손이 기억하는 거죠.”
그는 같은 글자라도 매번 다르게 쓴다. 글씨 하나에도 그날의 감정, 몸 상태, 먹의 질감이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같은 가게 이름이라도 두 번 다시 똑같이 쓰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붓글씨의 본질이고, AI가 결코 복제할 수 없는 이유다. “AI가 붓글씨 폰트는 만들 수 있어요. 그런데 사람의 손에서 나오는 기운은 못 만들어요. 나는 붓을 들기 전에 손님 얼굴 생각하면서 써요. 기계는 그걸 모르잖아요.”
작업실 한쪽에는 낡은 붓들이 줄지어 꽂혀 있다. 털이 다 빠진 붓, 갈라진 붓, 너무 오래 써서 손잡이가 닳아버린 붓들이다. 그는 이 붓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이 붓으로 1998년에 어떤 찻집 간판을 썼고, 저 붓은 2002년에 어느 분의 위패를 썼어요.” 붓은 도구가 아니라 시간의 기록이고, 감각의 축적이다. 컴퓨터는 저장은 하지만 기억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기억으로 글씨를 쓰고, 그 기억이 간판에 고스란히 남는다.
사라지는 기술이 아닌, 사람에게로 되돌아가는 기술
요즘은 붓글씨를 배우려는 사람도 줄고, 수요도 많지 않다. 대형 프랜차이즈나 상점은 대부분 기성 간판을 사용하고, 빠른 제작과 낮은 비용을 선호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최병도 장인은 붓을 놓지 않는다. 오히려 시대가 빠르게 흐를수록, 손으로 만든 글씨의 가치가 더욱 커진다고 믿는다. “기계가 못하는 걸 사람이 하면 그게 더 귀해지는 거예요. 나는 그걸 믿어요.”
그의 작업실에는 때때로 젊은 디자이너들이 방문한다. 전통을 배우고 싶어서, 혹은 한 번쯤 붓을 쥐어보고 싶어서 찾아온 이들이다. 그는 그들에게 기계로 만든 폰트와 손 글씨의 차이를 설명해 준다. 그리고 직접 먹을 갈게 하고, 붓을 쥐게 한다. “처음엔 다 어색해해요. 하지만 금방 빠져들어요. 왜냐하면 이건 기계랑 달리, 글씨에 자기감정이 나오거든요.”
그는 이제 작업량을 줄였지만, 여전히 중요한 의뢰는 직접 한다. 최근에는 해외 한식당에서 한글 간판을 의뢰해 왔고, 그는 글씨만 아니라 글자 배열, 감정의 흐름까지 조율해 정성껏 썼다. 손 글씨는 단순히 한글을 써넣는 게 아니라, 보는 이로 하여금 느낌을 전달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간판은 거리의 첫인상이자, 가장 진짜인 말이에요. 폰트는 말만 하고, 손 글씨는 마음마저 전해요.”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사람의 손에서 나온 감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최 장인의 글씨는 그렇게 살아 있고, 앞으로도 살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것이 여전히 가치를 가진다는 강력한 증거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나는 기술자 아니라 글씨 쓰는 사람이고, 글씨는 결국 사람을 위한 거예요. 기계는 사람을 대신 못 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 카테고리의 다른 글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수공 도자기 장인 인터뷰 (1) | 2025.07.02 |
---|---|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수제 양초 공방의 정성과 기술 (0) | 2025.07.02 |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손으로 빗자루를 만드는 마지막 세대 (0) | 2025.07.01 |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전통 한복 장인이 말하는 손맛의 가치 (1) | 2025.07.01 |
AI 시대에도 살아남은 수공업 직업군: 40년째 칼 갈이 장인의 하루 (2) | 2025.07.01 |